서울 강서구 등촌동에는 한때 한국 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추상화가인 유영국 작가(1916~2002)가 살며 작업하던 집과 화실이 있었다. 오늘날 등촌동은 아파트와 상가가 밀집한 주거지역으로 알려져 있지만, 1970년대 후반만 해도 논밭과 과수원, 낮은 주택들이 어우러진 서울의 외곽 지역이었다. 유영국 작가는 바로 이곳에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완성해 나갔다.
유영국 작가는 경북 울진 출신으로 일본 도쿄 문화학원에서 수학하며 일찍부터 추상미술을 접했다. 해방 이후에는 신사실파, 모던아트협회 등을 창립하며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었다. 특히 자연을 단순한 풍경이 아닌 선과 면, 색채의 구조로 해석한 독창적인 추상회화로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1977년 유영국 작가는 심장 질환으로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시기에 새로운 작업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오랫동안 거주하던 중구 약수동을 떠났다. 이후 약 6개월간 임시 거처에서 생활한 뒤, 1978년 현재의 서울 강서구 등촌동 186-1번지에 새로 지은 2층 양옥집으로 이사했다. 그는 이 집에 대해 “겨울 아침 해 뜨는 풍경이 아름다운 집”이라고 표현했다.
등촌동이 위치한 지역은 본래 김포군 양서면에 속했으나 1963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되었고, 1977년 영등포구에서 분리되어 강서구가 신설되면서 강서구 관할이 되었다. 이후 1988년 강서구에서 양천구가 다시 분구되면서 지역명과 행정구역에 대한 혼동이 생기기도 했다. 일부 자료에서 등촌동 주소가 양천구로 기록되는 경우가 있으나, 유영국 작가가 이사한 1978년 당시 행정구역은 강서구였다.
이때부터 시작된 약 9년의 시간을 흔히 ‘등촌동 시대’라 부를 수 있다. 등촌동의 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었다. 자택과 화실이 함께 있는 작업 공간이었다. 유영국 작가는 이곳에서 매일 그림을 그렸고, 수많은 전시를 준비했다. 당시 사진에는 등촌동 자택 주변 풍경, 화실 내부에서 작품 도판을 정리하는 모습, 작업 중인 모습 등이 남아 있다. 집 마당과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지금의 도시화된 강서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등촌동 시절은 유영국 작가 예술의 원숙기에 해당한다. 그는 이 시기에 산, 하늘, 태양, 노을과 같은 자연의 이미지를 더욱 단순하고 강렬한 색면으로 표현했다. 1980년 개인전에서는 ‘아침 해’, ‘노을’, ‘동산의 나무’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선보였는데, 이는 그가 등촌동에서 바라보던 풍경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자연을 사랑했던 작가는 도시 외곽의 한적한 풍경 속에서 자신만의 추상 언어를 더욱 깊게 발전시켰다.
1970년대 후반의 등촌동은 아직 도시 개발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밀려오기 전이었다. 봉제산 자락과 한강변 사이에는 논밭과 과수원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낮은 주택과 농가가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날 아파트 단지와 간선도로로 채워진 풍경과 달리, 당시의 등촌동은 서울 속 농촌의 모습을 간직한 공간이었다. 유영국 작가가 집의 가장 큰 장점으로 ‘겨울 아침 해 뜨는 풍경’을 꼽은 이유 역시 이러한 자연환경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1987년 유영국 작가는 건축가인 차남 유건이 설계한 서초구 방배동의 새 집으로 거처와 화실을 옮겼다. 그렇게 약 9년간 이어진 등촌동 생활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 가운데 하나가 강서구 등촌동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 등촌동 186-1번지의 정확한 현황은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도시 개발 과정에서 지번이 분할·합병되거나 변경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당시 건물이 남아 있는지 여부도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곳이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인 유영국 작가가 살고 작업하며 수많은 작품을 탄생시킨 장소였다는 사실이다.
등촌동의 오래된 골목과 풍경 대부분은 사라졌지만, 이곳에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의 기억이 남아 있다. 유영국 작가의 등촌동 화실은 강서구가 간직했어야 할 또 하나의 근현대 문화유산이며, 앞으로 지적도와 항공사진, 건축물대장, 주민 구술 등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복원되고 기록될 가치가 있는 장소이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화백(1916~2002)의 탄생 11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회고전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1층 전시실 및 로비에서 2026년 5월 19일부터 10월 25일까지 열린다. 1930년대 초기 추상 실험부터 후기 심상 추상에 이르는 작품 세계를 회화, 사진, 드로잉 등 170여 점의 작품으로 살펴볼 수 있으며, 미공개작과 다양한 아카이브 자료를 함께 소개하는 역대 최대 규모의 유영국 회고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