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봉(朴濟鳳, 1892~1964)은 부천 역곡동 벌응절리 일대와 연결되는 인물로, 일제강점기에는 교육자에서 출발해 조선총독부 학무국 촉탁, 조선유도연합회 참사, 경학원 사성으로 이동한 대표적 친일 유림 인사였다. 현재 공개 자료를 종합하면 그는 1916년부터 1927년까지 수하동공립보통학교, 매동공립간이실업학교, 경성상업학교 등에서 부훈도·훈도·교유로 근무했고, 1928년부터 1939년까지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학무과 촉탁으로 재직했다. 이 경력은 그가 단순한 향촌 유림이 아니라 식민지 교육 행정과 직접 연결된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박제봉의 친일 성격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1937년 이후다. 그는 중일전쟁기인 1937년 8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문서과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고, 이 사실은 당시 신문에 미담 형식으로 보도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당시 그의 월 수당은 90~95원 수준이었는데, 그에 비해 1,000원은 매우 큰 금액이었다. 이는 단순한 행정 참여를 넘어 전시 동원 체제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행위로 볼 수 있다.
1939년 11월 그는 조선유도연합회 참사를 맡았다. 조선유도연합회는 조선총독부 지원 아래 전국 유림을 결집해 총후봉공 정신운동을 벌인 친일 성격의 유림 단체로 평가된다. 이어 1941년과 1942년에는 조선총독부 직속 기구인 경학원 사성을 지냈다. 경학원은 성균관의 전통적 위상을 식민지 통치 이념에 편입해 활용한 기관이었고, 사성은 그 내부의 핵심 직책이었다. 따라서 박제봉은 유학자 출신이라는 문화적 권위를 바탕으로 식민지 지배 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협력한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의 친일 행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박제봉은 경학원 사성 재직 중 1941년 조선유림성지순배단 간사로 일본의 이세신궁과 메이지신궁 등을 순례했고, 귀국 후에는 황국신민 의식을 찬양하는 취지의 발언을 남긴 것으로 정리된다. 또 1942년에는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와 정무총감 오노의 이임을 전별하는 시를 지으며, 특히 미나미를 “활불”에 비유해 칭송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런 점 때문에 그는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고, 후대 연구와 지역사 논의에서도 부천을 대표하는 친일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거론된다.
부천 지역사에서 박제봉이 다시 주목받은 것은 역곡동 고택 논란과 연결되면서다. 2020~2021년 부천 역곡동 고택의 문화재 지정 및 보존 문제가 제기되자, 이 집이 박제봉과 연결된 공간이라는 점이 지역사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관련 기사와 지역 활동가들의 조사에 따르면, 박제봉의 묘는 고택 뒤 춘덕산 중턱에 있고 비석에 “경학원사성”이라는 직함이 새겨져 있어, 후손과 지역사회가 그의 경력을 기억하고 있었음도 확인된다. 다만 고택의 전 기간 거주 여부나 건물 원형과 박제봉 본인의 직접적 생활사 전체를 복원하는 데에는 추가 사료 검토가 더 필요하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범위는, 박제봉이 벌응절리 출신이며 역곡동 고택과 부천 지역 기억 속에서 친일 인물로 호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리하면 박제봉은 교육자 출신으로 출발했지만, 1930년대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학무 행정, 유림 친일단체, 경학원 핵심 직책을 거치며 식민지 통치 이념에 적극 협력한 인물이었다. 그의 생애는 유학자의 전통적 권위가 일제 말기 황도유학과 총후봉공 논리로 전환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박제봉은 단순히 “부천의 옛 인물”이 아니라, 지역 명망과 식민지 권력이 결합해 어떻게 친일 협력의 형태를 띠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직원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매일신보』, 1937.8.19., 박종선, 「‘역곡동 고택’은 친일파 박제봉이 살았던 집이다」, 2025; 박종선, 「2021년 친일파 박제봉, 부천에 등장하다」, 2022; 박종선, 「박제환·박제봉 형제의 ‘한 시대 다른 삶’」,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