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균(朴容均)은 일제강점기 부천군 부내면 하리를 기반으로 활동한 의사 출신 대지주로, 전문직 경력과 대규모 토지 소유, 그리고 지방 공적 직책이 한 인물에게 결합된 사례다. 확인되는 자료에 따르면 그는 1888년경 출생했으며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인천부 금곡리에서 인제의원을 개업해 운영했다. 동시에 1920년대 도평의회원으로도 활동했는데, 이는 그가 단순한 의료인이 아니라 식민지기 지방 행정과 사회적 의사결정 구조에도 참여한 지역 엘리트였음을 보여준다.
그의 경제적 기반은 매우 컸다. 1938년 주소는 부천군 부내면 하리 382번지로 확인되며, 1949년에는 서울시 안국동 17의 1번지에 거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1938년 경기도농회가 작성한 30정보 이상 지주 명부에 수록되어 있었고, 1937년 6월 말 기준 부천군에 논 72정보, 밭 20정보, 총 92정보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고용한 소작인 수는 238명에 달했다. 이 수치는 박용균이 단순한 중소 지주가 아니라, 부천 지역 농업 생산과 소작 관계를 대규모로 통제한 상층 대지주였음을 뜻한다.
특히 박용균의 사례에서 주목할 점은 ‘의사’와 ‘대지주’라는 두 정체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식민지기 조선에서 근대 전문교육을 받은 의사는 사회적 권위가 높았고, 여기에 대규모 농지 소유까지 결합될 경우 지역사회에서의 영향력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박용균은 인천에서 의원을 운영하는 전문직 종사자였으면서도, 부천에서는 90정보가 넘는 농지를 가진 지주였고, 다시 도평의회원으로 공적 지위까지 확보했다. 즉 그는 의료, 토지, 지방 행정이라는 세 축을 동시에 가진 지역 지배층의 한 유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부분은 해방 이후 주소가 서울 안국동으로 확인된다는 점이다. 이는 해방 전 부천을 기반으로 한 지주가 해방 후 서울 중심지로 생활 거점을 옮겼음을 보여주는데, 이런 이동은 농지개혁과 도시 중심 재편, 혹은 기존 지역 유지층의 생활 기반 변화와 연결해서 볼 수 있다. 다만 현재 확인되는 공개 자료만으로는 그가 해방 이후 어떤 사회적 역할을 이어갔는지, 농지개혁 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까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범위는, 박용균이 일제강점기 부천 지역에서 의사이자 대지주, 그리고 지방 공직 경험을 가진 유력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박용균은 식민지기 부천 사회에서 근대 전문직 종사자와 대지주, 지방 행정 참여자가 한 사람에게 결합된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이력은 당시 지역 유력층이 단순히 토지 소유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전문지식과 공적 지위를 함께 활용하며 영향력을 형성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박용균은 부천 지역의 농업 구조를 보여주는 대지주인 동시에, 식민지기 지역 엘리트의 복합적 성격을 드러내는 인물이었다.
참고문헌: 『농지개혁시 피분배지주 및 일제하 대지주 명부』,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5.1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일제강점기 경기도의 재력가』, 경기문화재단,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