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남재희(南載熙)

운영자

2026-04-19

남재희와 강서구


남재희와 강서구의 관계는 개인의 정치 경력 중 일부가 아니라,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장기간 정치 권력을 형성한 사례로 이해해야 한다. 확인 가능한 자료를 기준으로 보면, 그는 강서구를 단순한 선거구로 활용한 정치인이 아니라 약 10여 년 이상 동일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정치적 기반을 유지한 대표적 지역 정치인이었다.

 

남재희는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강서구를 기반으로 처음 당선되며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11대, 12대, 13대 국회의원까지 연속으로 선출되며 총 4선을 기록했다. 이는 단순한 연속 당선이 아니라, 1980년대 한국 정치 구조 속에서 특정 지역에서 장기간 지배력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당시 강서구는 지금처럼 대규모 도시화가 완료된 지역이 아니라, 김포군에서 서울로 편입된 이후 급격히 팽창하던 신흥 도시 지역이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남재희는 지역 정치 구조를 선점하며 자신의 정치 기반을 구축했다.

 

그의 강서구 기반은 단순한 지역 대표성 이상이었다. 그는 민주공화당, 이후 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으로 이어지는 여당 계열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중앙 정치 권력과 지역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정책위원회 의장 등 당 핵심 직책을 맡으면서, 강서구는 단순한 지역구가 아니라 중앙 권력과 직결된 정치 거점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 시기 강서구 정치의 특징은 분명하다. 하나는 개발 초기 지역이라는 점, 다른 하나는 중앙 권력과의 직접 연결이 가능했던 구조다. 1970~80년대 강서구는 김포공항, 공항시장, 농촌과 신도시가 혼재된 공간으로, 인구 유입과 도시 확장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 주민들은 생활 기반과 개발 이익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중앙 권력과 연결된 정치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남재희는 이러한 구조 속에서 안정적인 지지 기반을 형성한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구체적인 지역 조직 운영 방식이나 선거 전략에 대한 세부 자료는 제한적이어서 일부는 “확실하지 않음”의 영역으로 남는다.

 

또한 그의 정치적 성격 역시 강서구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 남재희는 전형적인 여당 정치인이었지만 동시에 “체제 내 리버럴”로 평가되기도 했다. 노동 문제나 정책 영역에서는 기존 보수 정치인과 다른 입장을 보이기도 했고, 이는 이후 노동부 장관 재직 시기 정책 방향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런 성향은 단순한 개인적 특징이 아니라,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 외곽 지역인 강서구의 사회적 조건과도 일정 부분 맞물렸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 부분 역시 명확한 직접 자료로 입증되기보다는 맥락적 해석에 가깝다.

 

결국 남재희와 강서구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그는 강서구에서 정치에 입문해 장기간 국회의원을 지내며 지역 기반을 구축했고, 그 기반을 통해 중앙 정치 권력으로 진입했다. 동시에 강서구는 그의 정치 활동을 가능하게 한 지역적 조건을 제공한 공간이었다. 즉, 강서구는 단순한 선거구가 아니라 한 정치인이 권력을 형성하고 유지하며 확장한 핵심 기반이었다.



남재희 장기 집권의 조건과 붕괴: 강서구 정치지형의 형성사

확인 가능한 선거기록과 강서구 인구·도시 변동 자료를 함께 보면, 남재희의 장기 집권은 개인 인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핵심은 여당 조직력, 개발기 지역의 생활 민원 정치, 그리고 아직 완전히 고정되지 않은 도시 외곽 유권자 구조가 겹쳤다는 데 있다. 다만 “동별 조직책 명단”이나 “사조직 운영 문건”처럼 구체적인 내부 자료는 공개적으로 충분히 확인되지 않아, 일부는 선거 결과와 지역 구조를 바탕으로 한 해석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둔다.

 

첫째, 남재희가 강서구에서 장기 집권할 수 있었던 구체적 지역 조직 구조는, 현재 확인 가능한 범위에서는 중앙 여당-지역구 의원-동 단위 생활 접점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권위주의·여당형 지역 조직에 가까웠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남재희는 1978년 강서구에서 처음 당선된 뒤 1981년, 1985년, 1988년까지 연속 당선됐고, 1988년 선거구 개편 뒤에도 강서구 을에서 다시 승리했다. 즉, 선거구 경계가 바뀌어도 일정 수준의 지지 기반을 유지했다는 뜻이다. 이런 유형의 장기 집권은 단순한 인지도보다, 동네 유지·직능단체·통반 조직·생활 민원망과 결합한 지역 조직이 작동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다만 그 조직의 실명 단위 구성과 운영 방식까지 공개 자료로 복원하기는 어렵다. 확실한 것은 남재희의 기반이 일회성 돌풍이 아니라, 적어도 1978년부터 1988년까지 유지된 지속 조직형 기반이었다는 점이다.

 

그 조직이 왜 강했는지는 당시 강서구의 성격과 연결된다. 1977년 분구로 출범한 강서구는 1988년 양천구가 분리되기 전후까지도 서울 서남부의 급팽창 지역이었고, 화곡동을 중심으로 한 주거 확장, 가양·등촌 일대의 택지 개발, 공항과 농경지, 기존 취락이 공존하는 복합 지역이었다. 이런 곳에서는 이념보다 주택, 도로, 교통, 생활기반 확충 같은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중앙 여당 소속 의원이 유리하다. 남재희는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으로 이어지는 집권 여당 계열에 있었기 때문에, 강서구 주민 입장에서는 중앙 권력과 직접 연결되는 통로처럼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그의 지역 조직은 강한 당조직만이 아니라, 개발 기대와 생활 민원 해결 능력에 대한 신뢰 위에서 작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 1980년대 강서구 주민 구성 변화는 선거 결과에 분명한 영향을 미쳤다. 우선 큰 구조 변화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인구 급증, 다른 하나는 1988년 양천구 분구다. 강서구는 1977년 약 35만 명 규모로 출발했고, 양천구 분구 직후인 1988년에도 37만 5,839명에 달했다. 또 양천구는 “목동신시가지계획의 마무리와 인구 증가” 속에서 1988년 강서구에서 분리되었다. 이는 곧 1980년대 강서구가 균질한 지역이 아니라, 목동·신정·신월 같은 급성장 지역과 화곡·가양·등촌·방화·공항 일대가 서로 다른 속도로 재편되던 공간이었다는 뜻이다. 선거적으로 보면, 남재희는 분구 이전의 큰 강서구에서 버텼고, 분구 이후엔 새로 정리된 강서구 을에서 다시 당선됐다. 이것은 그가 분구 이후 남은 서부 강서권에서도 일정한 적응력을 보였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 변화는 동시에 남재희 체제의 약화를 준비했다. 1992년 강서구 을 선거에서 남재희는 29.91%를 얻어 민주당 최두환에게 패배했다. 1988년 같은 선거구에서 31.32%로 당선됐던 것과 비교하면, 단순 득표율 변화는 크지 않지만 정권 프리미엄만으로는 버틸 수 없는 도시 유권자 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강서구는 대단지 공동주택 확대, 신흥 주거지 형성, 유입 인구 증가를 겪었고, 1990년대에는 가양동 임대아파트 조성, 방화·등촌·화곡·발산 등지의 대단위 공동주택단지가 본격화됐다. 이런 변화는 예전의 토착적·반토착적 동원 구조보다, 정당 경쟁과 도시형 이슈에 더 민감한 유권자층을 키웠다고 보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는 직접 설문 자료로 완전히 입증되지는 않지만, 1988년 승리 이후 1992년 패배, 1996년 이후의 정권교체형 선거 결과와 잘 맞아떨어진다.

 

셋째, 남재희 이후 강서구 정치 권력은 장기 여당 독점 구조에서 경쟁적 분점 구조로 재편됐다. 강서구 갑은 1988년 평화민주당 이원배, 1992년 민주당 박계동,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 신기남, 2008년 한나라당 구상찬, 2012년 민주통합당 신기남, 2016년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2020년과 2024년 더불어민주당 강선우로 이어졌다. 강서구 을도 1988년 남재희 이후 1992년 민주당 최두환, 1996년 신한국당 이신범, 2000년 새천년민주당 김성호, 2004년 열린우리당 노현송, 2008년 이후 한동안 보수계 김성태, 2020년과 2024년 더불어민주당 진성준으로 이동했다. 즉, 남재희 이후 강서구는 한 인물이 장기간 장악하는 구조가 아니라, 민주계와 보수계가 교차 승리하는 서울형 경합지가 되었다.

 

이 재편의 배경에는 도시 구조 변화가 있다. 강서구는 1988년 이후에도 인구가 계속 늘었고, 주택 수와 아파트 수가 크게 증가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가양·방화·등촌·화곡·발산의 공동주택 확대, 이후 마곡 개발까지 이어지면서, 강서구는 예전의 공항·농경지·기존 취락 중심 지역에서 아파트 단지와 신도시형 생활권이 섞인 거대한 도시 지역으로 바뀌었다. 이런 지역에서는 과거처럼 한 정치인이 오랫동안 생활민원형 조직만으로 지배하기 어렵다. 정당 브랜드, 중앙 정치 이슈, 계층과 주거 형태, 신도시 유입 인구의 성향이 더 크게 작동한다. 남재희 이후 강서구 정치가 인물 중심 장기 지배에서 정당 경쟁 중심으로 바뀐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리하면, 남재희의 강서 장기 집권은 권위주의 시기 여당 조직력과 개발기 외곽 도시의 생활정치 구조 위에서 가능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이후 강서구의 인구 유입, 주거지 재편, 분구와 아파트화가 진행되면서 그 기반은 점차 약해졌고, 1992년 패배를 기점으로 강서구는 특정 인물의 철옹성에서 벗어나 민주계와 보수계가 번갈아 차지하는 경합형 도시 선거구로 재편되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다만 남재희 개인의 세부 후원조직, 동별 핵심 인맥, 직능단체 연결망을 완전하게 복원하려면 선거공보, 당시 지역신문, 회고록, 구의회·당협 자료를 추가로 더 확인해야 한다. 지금 단계에서는 그 부분까지 단정하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