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김경현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양천향교 정문 좌측에는 조선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양천현을 다스렸던 수령들의 흔적이 모여 있는 비림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원래부터 계획된 공간이 아니라, 서울 편입 이후 도시 개발이 본격화되기 전 양천 일대 곳곳에 흩어져 있던 선정비와 불망비를 한곳으로 옮겨 정리한 결과다. 따라서 현재의 비림은 ‘원위치의 유적’이라기보다,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기억을 집합적으로 보존한 장소에 가깝다.
이 비림에는 총 9기의 비석이 모여 있으며, 제작 시기는 선조 연간인 16세기 후반부터 고종 연간인 19세기 후반까지 약 300년에 걸쳐 이어진다. 이 가운데 6기는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영조·순조·철종·고종 연간에 세워진 이덕소, 송우연, 김진교, 서칠보, 김보현, 이한경의 선정비와 불망비가 그것이다. 이 비석들은 해당 수령이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음을 기리거나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세워진 것으로, 지방 행정이 실제로 어떻게 평가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자료다.
반면 효종 연간에 세워진 박환과 이종룡의 선정비는 마모가 진행되어 탁본을 통해서만 내용을 확인할 수 있으며, 선조 19년에 세워진 라흡의 선정비는 풍화가 심해 비문 자체를 판독하기 어려운 상태다. 이 차이는 단순한 보존 상태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억이 어떻게 남고 사라지는지를 보여주는 물리적 흔적이다. 가장 오래된 비석일수록 내용이 사라지고, 비교적 최근의 비석일수록 형태와 글자가 남아 있다는 점은, 역사 기록이 항상 온전하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적으로 잔존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비림의 위치 또한 의미를 가진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 교육과 제례를 담당하던 공간이자, 관아와 함께 읍치의 중심을 이루던 시설이었다. 그 앞에 수령들의 공덕비가 모여 있다는 것은 교육, 제의, 행정이 하나의 공간 구조 안에서 결합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 일대는 양천현의 행정 중심지였으며, 궁산과 한강을 배경으로 형성된 정치적·지리적 핵심 공간이었다.
결국 양천향교 앞 비림은 단순히 ‘훌륭한 관리들을 기리는 장소’로만 볼 수 없다. 그것은 조선시대 지방 행정의 평가 방식이 남긴 기록이자, 근대 이후 도시 개발 속에서 재편된 유산의 결과이며, 동시에 일부는 이미 읽을 수 없게 된 채 남아 있는 ‘불완전한 기억의 집합’이다. 이 비석들은 각기 다른 시대에 세워졌지만, 지금은 하나의 장소 안에서 양천이라는 지역의 행정과 기억을 동시에 증언하고 있다.
사진 - 김경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