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속 강서구

해바라기 '사랑으로' - 공항동

운영자

2026-04-18


해바라기의 대표곡 〈사랑으로〉는 오랫동안 사랑과 위로, 연대의 노래로 불려 왔다. 수련회와 캠프, 추모와 다짐의 자리, 때로는 광장과 집회의 현장에서까지 이 노래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이 곡의 탄생 배경을 들여다보면, 〈사랑으로〉는 막연한 감동의 노래가 아니라 1980년대 말 한국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끌어안고 나온 노래로 읽힌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는 서울 강서구 공항동이라는 구체적인 장소가 놓여 있다.

 

1989년 2월, 공항동에서는 생활고를 비관한 네 자매의 동반 음독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중학교와 초등학교 진학을 앞둔 자녀들이 집안 형편이 부모에게 더 큰 부담이 될 것이라 여겨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막내딸이 숨지고 세 자매는 중태에 빠졌다가 이후 회복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사건은 단지 한 가정의 비극으로만 볼 수 없다. 그것은 고도성장과 올림픽의 환호 뒤에 가려져 있던 도시 빈곤, 교육비 부담, 가족의 생계 불안, 그리고 어린아이들마저 스스로를 짐으로 여기게 만든 사회의 냉혹함이 한순간에 드러난 사건이었다.

 

이주호는 이 사건을 신문 기사로 접한 뒤 〈사랑으로〉의 가사를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곡은 먼저 만들어져 있었지만, 오랫동안 붙지 못했던 가사가 공항동의 비극을 계기로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셈이다. 그래서 이 노래의 핵심은 추상적인 사랑의 찬가에 있지 않다.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는 가사는 바로 그 시대의 가장 어두운 곳, 사회의 번영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삶을 향해 뻗어 있는 말로 이해할 때 비로소 온전한 의미를 갖는다.

 

공항동이라는 장소 역시 중요하다. 이곳은 김포공항 인접 지역이자 서울 변두리 생활권으로, 도시 개발과 재편의 영향을 깊게 받아온 공간이다. 1980년대 후반 서울은 올림픽을 앞두고 세계도시를 자처했지만, 그 이면에서는 철거와 이주, 불안정한 주거와 생계의 문제가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공항동은 바로 그러한 서울의 그림자가 스며 있던 장소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사랑으로〉의 배경이 공항동이라는 사실은 우연한 지명 정보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성장 서사에서 밀려난 삶의 조건이 이 노래의 바탕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이 때문에 〈사랑으로〉는 단순히 모두가 함께 부르는 좋은 노래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이 노래가 품고 있는 것은 한 시대의 비극이며, 강서의 한 공간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의 기억이다. 우리가 이 곡을 공항동과 함께 다시 읽을 때, 비로소 익숙한 멜로디 뒤에 감춰져 있던 사회적 의미가 드러난다. 사랑은 공허한 구호가 아니라, 가장 약한 이들의 삶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노래는 때로 한 지역의 상처와 시대의 모순을 기록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이 곡 안에 새겨져 있다.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는 그래서 강서구 공항동을 지나 한국 현대사의 한 장면으로 이어지는 노래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 뜻 없이 따라 불렀던 후렴 속에는, 실제로 어두운 삶의 자리에서 손을 기다리던 이들의 현실이 놓여 있었다. 공항동이라는 지명을 다시 붙여 읽는 순간, 이 노래는 더 이상 추억의 대중가요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강서의 장소성과 한국 사회의 불평등, 그리고 그 속에서도 끝내 사랑을 말하려 했던 한 음악인의 응답이 함께 겹쳐진 문화적 기록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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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진학 부모님부담" 어린 4자매 자살 기도 

 

27일 하오 2시 30분쯤 서울 강서구 공항동4의43, 김원묵 씨(52) 집 지하셋 방에서 양태범 씨(44)의 큰딸 순미 양(14) 둘째딸 정미 양(10) 셋째딸 은미 양(8) 막내딸 세원 양(6) 등 4자매가 생활고를 비관한 끝에 극약을 마시고 신음중인것을 어머니 김옥순 씨(36)가 발견, 병원으로 옮겼으나 막내딸은 숨지고 나머지 3명은 중태다. 

 

어머니 김 씨에 따르면 하오 2시쯤 집근처 가게에서 쌀을 사갖고 돌아와보니 네 딸이 방안과 지하실입구 등에 쓰러져 신음중이고 막내아들(2)은 방안에서 울고 있었다는 것이다. 

 

큰딸은 안방책상위에 묵은달력을 뜯어 「엄마, 아빠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걱정마세요. 나쁜딸 올림. 부모님께」라는 내용의 유서를 검은색 사인펜으로 써놓았다. 

 

큰딸 순미 양은 병원에서 "집안 살림이 어려운데다 나는 중학교에 새로 입학하게 되고 넷째도 올해 국민학교에 진학하게 돼 집안부담이 너무 커질 것 같아 동생들과 함께 극약을 마셨다"고 말했다. 

 

아버지 양 씨는 경기도 부천에 있는 한비산업주식회사에서 공원으로 일하면서 월25만원 정도의 수입으로[2] 6명의 식구를 부양해 왔으며, 지난 87년 4월부터 이집 지하실방 2칸을 8백만원에 전세내 살아왔다. 

 

부모들은 경찰에서 "큰딸과 둘째딸은 어려움 속에서도 지난해 우등상을 탈 정도로 학교 성적이 우수했으며 평소 명량한 성격으로 이같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경향신문, 1989년 2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