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김태훈
박철 시인의 시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는 일상의 사소한 사건을 따라가면서도, 그 안에 놓인 삶의 균열과 조건을 서서히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시의 출발점은 분명하다. 막힌 하수도를 뚫은 노임 4만 원을 들고 설비업자에게 돈을 가져다주라는 아내의 심부름. 그러나 이 단순한 지시는 끝내 완수되지 못한 채, 시는 두 번의 ‘길 나섬’과 두 번의 ‘이탈’을 중심으로 흔들린다.
처음 길을 나섰을 때, 화자는 삼거리를 지나던 중 장대비를 만나 럭키슈퍼 앞에 멈춰 선다. 비를 피하려던 행동은 곧 자리를 잡고 앉아 병맥주를 마시는 일로 이어진다. 비는 그치지 않고, 쑥국새 울음처럼 반복되며 공간을 채운다. 여기서 이미 ‘돈을 갖다주기’라는 목적은 흐려지고, 화자는 잠시 일상의 의무에서 이탈한다. 두 번째 길에서도 마찬가지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나섰지만,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서 있는 자스민 한 그루’를 사게 된다. 이 선택은 더욱 분명한 방향 전환이다. 지급해야 할 돈은 다른 형태로 소비되고, 현실의 의무는 다시 뒤로 밀린다.
이 두 번의 이탈은 단순한 실수나 무능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는 그 어긋남 자체를 통해 화자의 내면을 드러낸다. 병맥주를 마시는 장면과 자스민을 사는 장면은 각각 육체적 욕구와 감각적 욕망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현실로부터 잠시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을 드러낸다. 특히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라는 표현은 자스민이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내면의 결핍을 메우기 위한 상징적 선택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나무는 곧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로 변하며, 욕망 역시 지속되지 못한 채 공허로 돌아온다.
결국 현실은 다시 도착한다. 영진설비 아저씨가 직접 찾아오고, 거친 말들이 아내 앞에 쏟아진다. 상황은 해결되지 않은 채 오히려 더 직접적인 긴장으로 전환된다. 이때 화자는 변명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웃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아이의 눈썹을 바라본다. 이 장면에서 시는 판단을 유보한다. 무능이나 책임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버티고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은 이 작품의 핵심이다. 처음의 ‘막힌 하수도’는 물리적인 문제였지만, 마지막에는 그것이 삶 전체의 상태로 확장된다. 뚫지 못한 것은 단순한 배관이 아니라, 생존의 압박, 가장으로서의 책임, 혹은 스스로의 내면일 수도 있다. 쑥국새의 울음과 그치지 않는 비, 그리고 문 밖에 서 있는 향기 잃은 나무는 모두 이 막힘을 다른 방식으로 반복하는 이미지들이다.
이 시에서 ‘영진설비’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과 책임이 교차하는 지점이며, 반드시 도달해야 하지만 끝내 닿지 못하는 현실의 자리다. 그래서 마지막 구절 “내겐 아직 멀고 먼 /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는 물리적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조건과 의무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는 문장으로 남는다.
결국 이 시는 ‘돈을 갖다주지 못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못하는 상태를 통해 한 인간의 삶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의무와 욕망, 책임과 회피, 가족과 생존이 뒤엉킨 자리에서 화자는 끝내 해결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그 미완의 상태 속에서, 이 시는 삶의 구체성과 진실에 가까워진다.
사진 - 김경현

사진 - 김경현

사진 - 김경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