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김경현
개화산 중턱에 자리한 약사사는 오래된 사찰이지만, 단순히 오래되었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장소다. 이 절은 한 시기에 완성되어 보존된 유물이 아니라, 시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며 그 의미와 형태가 계속 바뀌어 온 공간이다. 창건 시점은 분명하지 않다. 신라 때 세워졌다는 전승이 전해지지만 이는 확실하지 않으며, 현재 경내에 남아 있는 석불과 삼층석탑이 고려 후기 양식으로 평가된다는 점에서 적어도 그 시기에는 이미 사찰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약사사는 특정한 시작점보다 오랜 시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온 ‘지속된 장소’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이 사찰은 중요한 변화를 겪는다. 본래 개화사라 불리던 이곳은 18세기 조선 후기 권력 핵심 인물인 송인명과 연결되면서 성격이 달라진다. 그는 젊은 시절 이 절에 머물며 공부했고, 이후 높은 관직에 오른 뒤 사찰을 크게 중수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보수가 아니라 사찰의 위상을 바꾸는 계기였다. 약사사는 개인 수행의 공간에서 벗어나 권력과 연결된 사찰, 즉 특정 가문의 후원을 받는 원찰의 성격을 갖게 되었고, 지역 사찰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 시기 약사사는 종교 공간이면서 동시에 학문과 정치, 그리고 후원이 교차하는 장소였다.
이후 사찰의 이름은 개화사에서 약수암, 약수사, 약사사로 바뀌어 간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명칭 변경이 아니라 사찰의 기능이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약사’라는 이름은 약수와 치유, 그리고 약사여래 신앙과 결합되며 이곳이 병을 낫게 하고 소원을 비는 장소로 인식되었음을 드러낸다. 신앙의 방향이 수행에서 치유와 기도로 이동하면서 약사사는 보다 생활에 가까운 종교 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일제강점기에는 사찰령에 따라 봉은사의 말사로 편입되며 또 다른 변화를 겪는다. 이는 사찰이 더 이상 지역 내부의 자율적인 공간이 아니라 식민지 통치 체계 안에서 관리되는 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후 현대에 이르러 약사사의 건물들은 여러 차례 중창과 보수를 거치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오늘날의 전각들은 대부분 근현대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건물 자체는 오래된 유물이라기보다 시대에 따라 갱신된 구조물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사사가 유지되는 이유는 건물의 오래됨이 아니라 기능의 지속성에 있다. 이곳은 여전히 기도와 치유를 위한 장소로 사용되고 있으며, 지역 주민과 방문객들은 각자의 이유로 이 절을 찾는다. 개화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약사사를 지나며 잠시 머물고, 쉬어가고, 기도한다. 이러한 반복된 행위 속에서 약사사는 종교 시설을 넘어 일상의 흐름 속에 놓인 공간으로 작동한다.
결국 약사사는 하나의 성격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고려의 유물이 남아 있는 역사적 장소이면서, 조선 후기에는 권력과 연결된 사찰이었고, 식민지 시기에는 통제 구조 속에 편입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지역 주민과 방문객이 사용하는 생활 신앙의 공간으로 존재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시간의 층위가 겹쳐지며 형성된 장소라는 점에서, 약사사는 단순한 ‘오래된 절’이 아니라 시대마다 역할을 달리하며 이어져 온 공간이다. 지금의 약사사는 과거의 흔적 위에 서 있지만, 그 존재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현재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과 행위 속에 있다.

사진 - 김경현

사진 - 김경현

사진 - 김경현

사진 - 김경현

사진 - 김경현

사진 - 김경현
사진 - 김경현
사진 - 김경현
사진 - 김경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