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성택(沈星澤)은 일제강점기 김포 지역에서 활동한 지주이자, 전통적 한학자 이미지와 식민지기 지역 유력자의 성격을 함께 지닌 인물이었다. 1937년 12월 8일자 『동아일보』 「김포지방소개판」에서 그가 “한학계의 축숙인 하정 심성택옹”으로 소개된 것은, 적어도 당시 지역사회 안에서 그가 단순한 지주를 넘어 학문적 권위와 연륜을 갖춘 원로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현재 확인되는 자료만으로는 그의 구체적인 저술 활동이나 학문적 계보, 실제 한학 교육 활동의 내용까지 복원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그를 본격적인 학자라고 단정하기보다는, 전통 지식인으로서의 상징 자본을 지닌 지역 유력자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의 이력에서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은 식민지기 지방 행정과 토지 제도에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1914년 경기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을 지냈고, 1919년에는 대부면장을 역임하였다. 토지조사위원회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과 직결되는 기구였고, 면장 역시 식민지 말단 행정을 담당하는 핵심 직책이었다. 따라서 심성택은 단순히 토지를 많이 소유한 사람에 머문 것이 아니라, 식민지 행정 질서 속에서 일정한 공적 권한과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경제적 기반도 분명했다. 1938년 주소는 대부면 엽암리로 확인되며, 경기도농회가 작성한 ‘30정보 이상 지주 명부’에 수록되었다. 1937년 6월 말 기준 그가 김포군 내에 소유한 토지는 논 28정보, 밭 4정보로 총 32정보였고, 고용한 소작인 수는 50명이었다. 이는 그가 단순한 자작농이나 중소 지주가 아니라, 다수의 소작인을 기반으로 지대를 수취하는 대지주층에 속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50명의 소작인을 두었다는 사실은 그의 토지 경영이 개별 농가 수준을 넘어, 지역 농업 생산과 분배 구조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규모였음을 보여준다.
결국 심성택은 전통 한학자의 명망, 식민지기 지방 행정 경력, 그리고 대지주로서의 경제 기반이 한 인물에게 결합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지역사회에서 문화적 권위와 행정적 경험, 경제적 지배력을 함께 가진 인물이었으며, 이런 점에서 일제강점기 김포 지역의 전형적인 유력자 층을 보여준다. 따라서 심성택은 단순한 “한학계 인물”이나 “지주” 가운데 하나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전통적 권위와 식민지기 지역 지배 구조가 만나는 지점에 있었던 인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농지개혁시 피분배지주 및 일제하 대지주 명부』,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5.12, 『직원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동아일보』, 1937.12.8, 『일제강점기 경기도의 재력가』, 경기문화재단,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