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연구

김포군 양동면 일대의 참상(1925년 7월 24일자 동아일보 기사)

운영자

2026-04-17

출처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25년 7월 24일자 동아일보 호외에 실린 「김포군 양동면 일대의 참상」 기사는 단순한 지역 빈곤 보도가 아니라, 한강 유역 전반에 걸친 대홍수 속에서 오늘날 서울 강서구 일대가 어떤 방식으로 붕괴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기록이다. 실제 지면을 보면 이 기사는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 ‘경성 수해 상세보’라는 큰 틀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서울과 그 주변 지역 전체가 동시에 피해를 입은 상황 속에서 양동면의 사례가 제시된 것이다. 즉 이 사건은 특정 마을의 문제가 아니라, 한강 하류 전체를 덮친 재난의 일부였다.

 

기사에서 제시된 “128호 중 15호만 잔존”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마을 단위 생활 기반이 거의 붕괴된 상황을 의미한다. 여기에 “780여 명이 굶주렸다”는 서술이 덧붙는 것은, 수해가 단순히 주거 파괴에 그치지 않고 곧바로 식량 위기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러한 수치는 행정 통계라기보다 현장 취재를 바탕으로 한 추정에 가까우며, 재난의 규모와 긴박성을 전달하기 위한 언론적 표현이라는 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 사건을 강서구의 지리적 조건과 연결해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양동면, 즉 오늘날 염창·가양·등촌·방화 일대는 한강 하류에 위치한 대표적인 저지대였다. 제방과 수리 시설이 충분히 정비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한강 수위가 상승하면 가장 먼저 침수되는 지역이 바로 이곳이었다. 따라서 이 기사가 보여주는 참상은 단순한 우연적 재난이 아니라, 지형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취약성의 결과였다. 강서구는 처음부터 안정된 농업 지역이 아니라, 항상 수해 위험을 안고 있던 불안정한 생활 공간이었던 셈이다.

 

또한 이 기사에서 주목할 점은 국가의 대응이 아니라 청년단과 신문사 지국원이 직접 현장에 투입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당시 식민지 행정 체계가 이러한 재난 상황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며, 지역 주민들이 제도적 보호보다 민간 구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드러낸다. 즉 자연재해와 행정 부재가 결합되면서, 양동면 일대 주민들은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 사건을 장기적인 흐름 속에서 보면 더욱 중요해진다. 반복되는 수해와 빈곤은 토지 상실과 소작화로 이어지고, 이는 이후 일제의 수리사업과 토지조사, 더 나아가 김포비행장 건설과 도시 개발로 연결되는 기반이 된다. 다시 말해 1925년의 이 수해는 단순한 재난이 아니라, 강서구가 농촌에서 도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토지 구조와 생활 기반이 무너지는 초기 단계의 사건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 기사가 보여주는 양동면의 모습은 오늘날 도시 강서구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다. 그것은 한강 범람에 취약한 저지대 농촌이었고, 한 번의 홍수로 공동체가 붕괴될 수 있는 불안정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취약성이 이후 토지 재편과 국가 주도의 개발을 가능하게 만든 조건으로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