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연구

조선인민군_1950_0908_03

운영자

2026-04-17

자료명    조선인민군 

대표표제어    조선인민군_1950_0908_03 

자료구분    문서(노획문서) 

언어    국한문 

국내소장처    이화여대(사업팀) 

권호    219 

책임주필    정태성 

필자(소속)    박인걸 부분대장

 

원문    

등촌리 지점에 도착된 우리에게 전투명령이 하달되였다. 그것은 수원으로 통하는 도로를 차단키 위해 영등포 앞고지를 점령하고 적이 수원 방향으로 퇴각하는 것을 차단하라는 것이였다. 상부의 명령에 의해 우리 분대는 소대와 함께 앞고지를 점령하고 퇴각하는 적이 오기를 도로 좌우쪽에서 대기하였다. 당시 우리 분대가 차지하고 있던 지점은 부근에서도 제일 높은 고지였으며 그와 반대로 분대 인원은 불과 5명에 불과했다. 적은 자기들의 퇴각을 보장하려면 이 앞고지를 장악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아군을 포위하려 하였다. 적은 패잔병을 모주리 모아서 한 개 련대의 병력을 만들어가지고 아군이 장악하고 있는 앞고지를 향해 접근해 왔으며 특히 우리 분대가 차지하고 있는 높은 봉오리에 향하여 각종 포화력을 퍼부으면서 은밀히 접근해왔다. 고지의 사방에서 우리에게 접근하는 적들은 우리를 사면으로부터 반돌격해왔다. 나는 당시 경기관총수였다. 접근하는 적에게 사격하려 했다. 그러나 쏟아지는 비에 의하여 총신에 녹이 쓸어 사격을 할 수 없었다. 경기 좌지의 좌우전후에는 적의 포탄과 총알이 쉴 사이 없이 떠러졌다. 그러나 나는 침착하게 전호에서 경기를 분해하여 소제했다. 경기를 소제하고 사격준비를 갖추었을 때 적은 벌써 약 50메―터까지 접근해왔었다. 될 수 있는대로 적을 가까이 접근시키여야만 했다. 부사수는 부상당했다. 5명 되는 분대성원들은 수류탄과 보총으로 적과 육박전에 가까운 전투를 전개하고 있었다. 약 30-40메―터까지 적을 접근시킨 나는 불의에 사격을 개시하였다. 탄알 한알에 적 한명씩을 예상한 나는 점발로서 적을 한놈 한놈 거꾸러뜨렸다. 앞장서서 기여들던 적은 단번에 20여명이 쓰러지고 10여명이 비명을 올리며 주저앉았다. 약 1개 대대의 병력으로 기여들던 적은 당황실색하여 퇴각하기 시작했다. 악전고투하던 우리 분대는 적이 퇴각을 개시하자 고지 중복까지 추격하여 적을 완전히 도로 뒤까지 퇴각시켰다. 이렇게 하여 아군이 차지하고 있는 앞고지는 시종일관 견지되였으며 수원 방면으로 퇴각하려던 적은 치명적 타격을 받고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다. 나는 그후로도 이 경험을 옳게 살리고 있다. 침착하면 침착할쑤록 사격은 명중되고 적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비가 와서 총신에 녹이 쓴다 하여 총을 버리고 다른 수단을 쓰려고 하지 말고 총을 항상 정성껏 손질하여야 한다는 것을 나는 절실히 느꼈다. 그후 수십차에 걸친 적과의 가렬한 전투에서 나는 내가 당한 이 경험을 옳게 살려 철저히 실행하기에 노력하고 있다. 부분대장 박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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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1950년 9월 8일자 「조선인민군」에 실린 전투 수기로, 김포군 양동면 등촌리—오늘날 서울 강서구 등촌동 일대—를 실제 전투 공간으로 등장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앞선 선전 기사들과 성격이 다르다. 여기서 강서구는 더 이상 농민의 감정이나 정치적 결의를 보여주는 배경이 아니라, 전쟁의 물리적 전장이자 군사 작전의 요충지로 나타난다.

 

글에 따르면 인민군 부대는 등촌리 인근에 도착한 뒤 영등포 앞 고지를 점령하고, 수원 방향으로 퇴각하는 적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는 강서구 일대가 한강 서쪽에서 영등포—수원으로 이어지는 주요 이동 축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등촌리는 단순한 농촌 마을이 아니라, 서울 서부 방어선과 후퇴로를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위치였다. 실제로 이 지역은 평야와 구릉이 섞인 지형으로, 도로를 감시하고 차단하기에 유리한 고지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활용되기 쉬운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전투 서술은 소규모 분대가 고지를 점령한 뒤 다수의 적 병력을 상대로 방어전을 펼치는 과정에 집중되어 있다. 비로 인해 총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 부사수의 부상, 수류탄과 보총을 이용한 근접전 등은 당시 전투의 열악한 환경을 보여주는 동시에, 개인의 침착성과 전투 기술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특히 “탄알 한 발에 적 한 명”과 같은 표현은 사실적 기록이라기보다 전투 영웅담을 강조하는 서술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록이 가지는 의미는 분명하다. 강서구 일대가 실제 교전이 이루어진 공간이었고, 서울 서부 전선의 일부로 기능했다는 점이다.

 

이 지점을 강서구의 역사 흐름 속에 놓고 보면 중요한 전환이 보인다. 앞선 자료들에서 등촌리는 토지개혁과 농민 동원의 공간으로 그려졌지만, 이 글에서는 동일한 공간이 불과 몇 주 사이에 전투 지역으로 전환된다. 즉 농업 생산과 공동체 생활의 공간이 곧바로 군사 작전의 현장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는 한국전쟁 초기에 강서구가 겪은 급격한 공간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이 문서는 개인 경험을 통해 집단적 의미를 구성하는 방식도 유지하고 있다. 박인걸이라는 부분대장의 체험은 단순한 전투 보고가 아니라, “침착함”과 “무기 관리”라는 교훈으로 마무리된다. 이는 병사 교육용 서사로 기능하며, 실제 전투 경험을 일반화된 규범으로 전환하는 전형적인 군사 선전의 특징을 보여준다.

 

결국 이 자료에서 강서구는 세 가지 층위로 읽힌다. 첫째, 실제 전투가 벌어진 공간이라는 점. 둘째, 서울과 수도권을 연결하는 전략적 교통 요충지였다는 점. 셋째, 개인의 전투 경험이 집단적 군사 규범으로 재구성되는 서사의 배경이라는 점이다. 토지개혁과 정치 동원의 공간이었던 양동면 등촌리는, 전쟁이 심화되면서 곧바로 군사적 충돌의 최전선으로 변모했고, 이는 이후 도시화 이전 강서구가 겪은 가장 극단적인 공간 변화 중 하나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