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연구

문서(文券) 환급에 관한 건(1909년 01월 27일)

운영자

2026-04-17

자료명    문서(文券) 환급에 관한 건 

재판기관    경성구재판소(京城區裁判所) 

판결일자    1909년 01월 27일 

판사    능세관오(能勢寬吾) 

피고    최봉현(崔鳳顯) 

원고    김응린(金應麟 - 김문백[金文伯] 사[事]) 

판결요지    피고는 원고에 대하여 경기도 양천군(陽川郡) 가곡면(加谷面) 내발산리(內鉢山里) 인자답(人字畓) 10두락을 융희(隆熙) 2년 음력 4월 중 원고로부터 피고에게 매도한다는 취지의 기록이 있는 원고 명의의 문서 1건을 돌려주어야 함.

 

-

 

판결문 번역 

융희2년 민제155호 

결석 판결서 

경기도(京畿道) 양천군(陽川郡) 가곡면(加谷面) 내발산리(內鉢山里) 거주 일명 김문백(金文伯) 

원고 김응린(金應麟) 

경성(京城) 서부(西部) 만리현(萬里峴) 142통(統) 1호(戶) 거주 

피고 최봉현(崔鳳顯) 

위 문권(文券) 환급 사건을 심리하여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주문 

피고는 원고에 대해 경기도(京畿道) 양천군(陽川郡) 가곡면(加谷面) 내발산리(內鉢山里) 인자답(人字畓) 10두락(斗落)을 1908년 음력 4월에 원고가 피고에게 매도하였다는 취지가 기재되어 있는 원고 명의의 문권 1통을 반환해야 한다.

소송 비용은 피고가 부담한다. 

사실 및 이유 

원고는 주문과 동일한 판결을 구한다고 신청하였다. 그 사실은 다음과 같다. 

원고는 1908년 음력 4월 27일에 원고 소유의 일정한 신청에서 기술한 인자답 10두락을 값을 100환으로 정하고 피고에게 매도하고 그 매도에 관한 문권을 피고에게 교부한 뒤 선급금 55환을 받고 잔액 45환은 연체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해 9월에 이르러 소외(訴外) 박인성(朴仁成)이란 자가 해당 논은 자신이 샀다고 칭하면서 피고와 함께 원고 집에 와서 매매의 환퇴(還退)를 요구하였기에 원고는 이것을 승낙하여 이에 환퇴가 성립되었으며 일전에 피고로부터 받은 55환을 반환하였다. 그런데 동시에 위 문권을 반환받아야 할 터였는데, 피고는 문권은 박인성의 손에 있고 그는 지금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자신이 이를 돌려받아서 원고에게 반환하겠다는 취지의 약속을 하였다. 따라서 그 후 피고에게 그 반환을 독촉하여도 응하지 않았기에 본소(本訴) 요구에 이르렀다. 또한 피고는 적법한 호출을 받았음에도 심문 기일에 출두하지 않았기에 결석 판결을 구한다. 피고는 적법한 호출을 받았음에도 1909년 1월 25일 오전 10시의 심문 기일에 출두하지 않았다. 당 재판소는 원고의 본소 청구는 그 이유가 있다고 인정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1909년 1월 27일 

경성구재판소(京城區裁判所) 

판사 능세관오(能勢寬吾) 

1909년 1월 27일 판결 선고 

재판소 서기 대규요(大槻要) 

 

판결문 원문 

隆熙二年民第一五五號 

闕席判決書 

京畿道 陽川郡 加谷面 內鉢山里居 金文伯事 

原告 金應麟 

京城 西部 萬里峴 百四十二統 一戶居 

被告 崔鳳顯 

右文券還給事件ヲ審理シ判決スルコト左ノ如シ 

主文 

被告ハ原告ニ對シ京畿道陽川郡加穀面內鉢山里人字畓十斗落ヲ隆熙二年陰四月中原告ヨリ被告ニ賣渡タル旨ノ記載アル原告名義ノ文券一度ヲ還給ス可シ 

訴訟費用ハ被告ノ負擔トス 

事實及理由 

原告ハ主文ト同一ナル判決ヲ求ムト申立其事實トシテ原告ハ隆熙二年陰四月二十七日原告所有ナル一定申立中ニ述ヘタル人字水田十斗落ヲ價格壹百圜ト定メ被告ニ賣渡シ其賣渡ニ關スル文券ヲ被告ニ交付シ內金五十五圜ヲ受取リ殘額四拾五圜ハ延滯シアリシ處同九月ニ至リ訴外朴仁成ナル者該水田ハ自己ニ於テ買取リタルモノナリト稱シ被告ト共ニ原告方ニ來リ賣買ノ還退ヲ求メタルニ付原告ニ於テ之ヲ承諾シ茲ニ還退成立シ曩ニ被告ヨリ受取リタル金五拾五圜ヲ返還シタルカ同時ニ前述ノ文券ノ返還ヲ受クヘキ筈ノ處被告ハ文券ハ朴仁成ノ手ニアリテ同人ハ即今持來シ居ラサルヲ以テ自分ニ於テ之ヲ取戾シ原告ニ返還スヘキ旨ヲ約セリ依テ其後被告ニ對シ其還給方督促スルモ應セサルニヨリ本訴要求ニ及フト陳述シ且被告ハ合式ノ呼出ヲ受ケナカラ審問期日ニ出頭セサルヲ以テ闕席判決ヲ求ムト申立タリ 被告ハ合式ノ呼出ヲ受ケナカラ隆熙三年一月二十五日午前十時ノ審問期日ニ出頭セス 

當裁判所ハ原告ノ本訴請求ハ其理由アルモノト認メ主文ノ如ク判決ス 

隆熙三年一月二十七日 

京城區裁判所 

判事 能勢寬吾 

隆熙三年一月二十七日 判決言渡 

裁判所書記 大槻要

 

-

 

1909년 경성구재판소에서 내려진 이 판결은 오늘날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 일대에 해당하는 옛 양천군 가곡면 내발산리를 배경으로 한 토지 매매 분쟁 사건으로, 근대적 사법 체계가 지역의 토지 관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초기 양상을 보여준다. 사건의 핵심은 논 10두락, 즉 일정 규모의 농지에 대한 매매 계약과 그 계약을 증명하는 ‘문권’의 반환 문제다. 김응린(일명 김문백)은 해당 토지를 100환에 최봉현에게 매도하고 문권을 교부했으나, 이후 제3자인 박인성이 등장해 자신이 해당 토지를 매수했다고 주장하면서 매매가 취소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에 따라 김응린은 이미 받은 선급금 55환을 반환하고 계약을 원상회복했지만, 정작 토지 소유를 증명하는 핵심 문서인 문권은 돌려받지 못한 채 분쟁이 이어졌고, 결국 재판으로까지 비화된다.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금전 거래나 개인 간 다툼이 아니라, 토지 소유를 둘러싼 권리가 어떻게 문서화되고, 그 문서가 법적 효력을 가지며, 국가 권력이 이를 강제하는 구조로 전환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 후기까지 토지 거래는 관습과 지역 공동체의 승인에 크게 의존했지만, 이 판결에서는 문권이라는 서면 증거가 결정적 기준으로 작동하고, 이를 반환하도록 명령하는 재판소의 판단이 권리 관계를 확정짓는다. 특히 피고가 재판에 출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려진 ‘결석 판결’이라는 점은,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국가 사법권이 토지 분쟁을 일방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강서구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이 사건은 이후 이 지역이 겪게 될 토지 구조 변화의 출발점과도 맞닿아 있다. 내발산리는 당시 전형적인 농업 지역으로, 논과 밭을 중심으로 한 소유와 경작 관계가 지역 사회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 판결에서 드러나듯, 토지는 더 이상 단순한 생계 기반이 아니라 금전 가치로 환산되고, 문서로 거래되며, 법적으로 보호받는 ‘재산’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는 곧 식민지기 토지조사사업과 근대적 소유권 확립으로 이어지며, 지주-소작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이 사건은 동일 토지를 두고 복수의 매매 주장자가 등장하는 혼란을 보여주는데, 이는 당시 토지 소유권 체계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과도기적 상황을 반영한다. 이런 혼란 속에서 문권을 누가 보유하고 있는가가 곧 권리의 핵심으로 작동하게 되고, 이를 둘러싼 분쟁이 법정으로 이동하는 과정은 지역 사회의 권력 중심이 공동체 내부에서 국가 제도로 이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이 판결은 강서구가 오늘날의 도시로 변모하기 이전, 농촌 사회에서 토지가 어떤 방식으로 거래되고 분쟁이 발생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분쟁이 근대적 사법 체계에 의해 어떻게 재편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내발산리의 이 사례는 이후 강서구 전역에서 진행될 토지의 상품화, 법제화,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도시 개발과 수용으로 이어지는 긴 흐름의 출발점에 놓인 장면으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