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연구

조선인민보_1950_0823_02_01

운영자

2026-04-17

자료명    조선인민보 

대표표제어    조선인민보_1950_0823_02_01 

자료구분    문서(노획문서) 

언어    국문 

국내소장처    이화여대(사업팀) 

권호    53 

발생소(지역)    서울시 태평로 1가 31 

발행사    조선인민보사 

필자(소속)    최준철 특파원 

지명    독촉국민회, 부인회, 청년단, 인민의용군,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 중앙위원회, 인민위원회 

 

원문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 등촌리 3구에 사는 금년 46세의 빈농 조한구씨는 토지의 주인이 된 환희와 감격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왜정시대에 전후 12년 동안 적산 농장에서 3천 3백평의 논을 간신히 얻어 소작하다가 8.15 해방을 맞이하자 응당 내 고혈을 바친 이 땅만은 내 것으로 될줄 알았더니 해방의 은인이란 가면을 쓴 미국놈들이 와서 일본놈보다 더 심하게 소작권까지 아무 리유없이 빼앗아 갔다. 이리하여 이 동리 청년들도 울분을 참지 못하여 『토지는 농민에게』 『악덕지주를 타도하자』라는 등 구호를 들고 1947년 7월 28일 놈들을 반대하는 정의의 인민투쟁을 일으키었다. 그러나 놈들은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미군을 반대하는 폭동이라고 하여 기관총은 물론 땅크까지 출동시켜 피로써 강제 진압하는 한편 수많은 청년 농민들이 놈들의 쇠고랑에 채여 끌려갔다. 이때 우리 큰아들 원남(26)이도 피검되어 소위 맥아더의 포고령 제2호 위반으로 군정 재판에서 10년 언도를 받고 이번에 영용한 인민군의 진격에 의하여 해방되어 영등포 형무소에서 나오기는 하였으나 이 투쟁을 지휘한 조준구씨의 행방을 대지 않는다고 하여 혀를 자르고 왼편 다리 마저 부러뜨리는 악형 고문으로 그 애는 결국 반신불수의 병신이 되고 말았다. 이 골수에 사무친 원한을 한 시인들 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번 영용한 인민군대의 덕택으로 해방된 후 당당한 토지의 주인이 된 나로서는 이 감격과 기쁨을 무어라고 말할 수 없다. 리승만 역적 놈의 때에는 논 16두락을 소작하여 잘되는 해야 겨우 벼 40가마가 나는 것을 소작료라고 하여 14가마를 빼앗기는 외에 지주 놈은 거름값이니 평년작 추수가 못되니 손해 배상하라는 등 각 가지 면목으로 강제로 7가마를 빼앗아 간다. 그리고 파출소 순경놈에게 추수기에 두 말을 강탈 당하는데 그리고도 부족해서 소득세와 호구세만 하여도 1년에 6천원 이상이 있고 또 그 외에 독촉국민회니 부인회니 청년단비니 무슨 무슨 기부금이니 하여 뜯어가는 것만 하여도 1년에 2만원 이상이나 되었으니 열한식구가 밥만 먹자고 하여도 한 달에 세 가마가 있어야 되는 판에 어떻게 살았겠는가 죽을 생각도 몇 번이나 하였다. 이러한 지옥같은 생활에서 어린 것 여덟을 길러내는데 제 때 입히고 먹여본 일이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온 보람이 있어 이번 토지 개혁에 논 4천 2백평을 무상으로 분여받았다. 토지를 받던 그날 나도 벅찬 감격에 잠을 이을 수가 없어 한 두밤을 뜬 눈을 새웠다. 우리 집사람과 □□된 아들 원남이도 그랬다는 것을 이튿날 아침에 알았다. 원남이하고 나는 내 땅이 □ 논두렁을 하루밤새 밟□보았다. 원남이는 토지의 주인이 된 감격으로 원쑤 □제 침략군대와 리승만 역당을 조국 강토에서 구축 소탕하는 조국 해방 전쟁에 나가서 조국 해방 전쟁에 나가서 조국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고 혹독한 고문으로 다리가 절고 말도 못하는 몸으로 그 이튿날 곧 인민의용군을 자원하였으나 심사에 합격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원남이는 락심하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하고 있다. 리승만 등 반역도당을 조선인민의 원쑤로서 □하자는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 중앙위원회의 호소문이 나왔을 때에는 원남이가 이 동리에서 제일 먼저 나가서 『조선인민의성명서』에 서명날인하고 내가 그 다음에 서명하였다. 이 원쑤놈들은 한 곳에 집어넣고 3천만 동포가 처단해야만 우리의 원한이 풀리겠다. 이러기 위하여서는 우리들 농민은 한 줌의 쌀이라도 더 증산하여 부산으로 진격 중에 있는 인민군대를 원호하여야하겠다. 우리 동리에서도 소작 논 한 평 못얻어 하던 사람도 이번에 토지의 주인이 된 사람이 있다. 해방되고 인민위원회 위원을 우리 손으로 선출하고 토지의 주인이 된 우리 농민들의 오늘의 감격과 기쁨은 일찍이 우리 조상들은 한번도 당해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큰 감격과 기쁨에 우리는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오직 조선인민의 수령이시며 영명한 지도자이신 김일성 장군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리며 마음 속 깊이 이 은혜를 갚기 위하여 한 몸을 바쳐 농업 증산에 돌진할 것을 맹세할 뿐이다.』 【최준철특파원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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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23일자 「조선인민보」에 실린 이 기사는 김포군 양동면 등촌리 3구, 즉 오늘날 서울 강서구 등촌동 일대를 배경으로 한 한 농민의 증언을 통해 토지개혁과 전쟁을 결합시키는 정치적 서사를 구성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조한구라는 빈농의 개인 경험을 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강서구 지역 농민의 삶을 특정한 방향으로 재구성하여 체제의 정당성과 전쟁 동원의 필요성을 동시에 강조하는 선전 텍스트로 읽힌다.

 

이 서사가 출발하는 지점은 강서구의 과거, 즉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농촌 사회의 구조다. 등촌리를 포함한 양동면 일대는 소작농 중심의 농업 지역이었고, 조한구의 증언에 나타나는 적산 농장 소작, 높은 소작료, 각종 명목의 추가 수탈, 세금과 공출 부담은 당시 농민이 처했던 구조적 조건을 반영한다. 특히 생산물의 상당 부분이 지주와 국가 권력에 의해 회수되고, 생계 유지조차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는 서술은 강서구가 오늘날의 도시 이미지와 달리 극심한 빈곤과 종속 관계 속에 있었던 농촌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문서의 핵심은 이러한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그 재구성에 있다. 조한구의 경험은 “일제 → 미군정 → 이승만 정권”으로 이어지는 억압의 연속선 속에 배치되며, 그에 대한 저항으로 1947년 농민 투쟁이 등장한다. 이어 아들의 체포와 고문, 그리고 그로 인한 신체 훼손이라는 극단적 서술이 덧붙여지면서 개인의 고통은 집단적 원한으로 확장된다. 이 과정에서 강서구 지역은 단순한 생활 공간이 아니라, 억압과 투쟁, 그리고 해방이 교차하는 정치적 무대로 재정의된다.

 

이 서사의 전환점은 토지개혁이다. 조한구는 4천 평이 넘는 토지를 분배받으며 ‘토지의 주인’이 되었다고 말하고, 그 감격을 밤새 논두렁을 걸으며 확인하는 장면이 제시된다. 여기서 토지는 단순한 생산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삶의 통제권을 상징하는 대상으로 격상된다. 그러나 이 감정은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곧바로 아들 원남의 의용군 지원 시도, 마을 주민들의 서명 운동 참여, 군사 지원과 증산 결의로 이어지며, 토지개혁은 전쟁 동원의 출발점으로 기능한다.

 

이 구조를 강서구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중요한 의미가 드러난다. 등촌리를 포함한 양동면 일대는 실제로 해방 직후까지 농업 중심 지역이었고, 토지 문제는 지역 사회의 핵심 갈등 요소였다. 그러나 이 문서는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체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만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로 설정하고, 그 결과를 전쟁 참여와 체제 충성으로 연결한다. 농민은 토지의 주인이 되는 동시에 국가와 전쟁에 종속된 새로운 주체로 재구성된다.

 

결국 이 자료에서 강서구는 단순한 지역 사례를 넘어, 농촌 사회의 기억이 정치적으로 조직되는 공간으로 나타난다. 토지개혁은 경제적 변화이자 감정의 재편이며, 그 감정은 전쟁 동원과 체제 정당화로 이어진다. 이후 김포공항 건설과 도시 확장을 거치며 이 지역이 완전히 다른 도시 공간으로 전환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문서는 강서구가 농촌에서 도시로 넘어가기 직전, 농민 사회가 가장 강하게 정치화된 순간을 기록한 사례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