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명 해방일보
대표표제어 해방일보_1950_0831_02_01
자료구분 문서(노획문서)
언어 국문
국내소장처 이화여대
권호 61
발생소(지역) 서울시
발행사 해방일보사
필자(소속)
지명 김포군, 양동면, 등촌리
원문
(김포군에서 조덕송 특파원발) 대망의 토지소유권 증명서 교부사업은 25일 김포군 양동면 등촌리에 있어서도 전체 농민들의 감격과 환희 속에 원만히 종료되였다. 고용농가 18호 토지 없는 농가 19호 토지적은 농가 66호 자작농 27호 농민들은 이미 분여 받은 토지에 대하여 영원히 자기 땅으로 경작할 수 있는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여주는 소유권 증명서를 교부받기 위하여 전체 농민들이 모인가운데 농민총회를 개최하였다. 매개 농민들은 총회에서 농촌위원장 박삼석씨가 진술하는 보고연설을 하나하나 감슴속 깊이 아로사겼다. 박삼석 농촌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등촌리에 있어서의 토지분여사업은 고용농가18호에 대하여 2만2천2백97평의 토지를 무상으로 넘겨준 것을 위시하여 토지 없는 농가 19호에 대하여는 4만5천8백□평 토지적은 농가에 대하여는 9만7천□백62평의 토지를 각각 분여함으로써 지난날의 억울하고도 기막히던 착취적 토지관계를 일체 청산하여 버렸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교부받는 토지소유권 증명서는 여러분이 영원한 자기 토지로 지어먹을 수 있는 법적으로 보장하여주는 유일한 “문서”인 것이다. 이제는 어디메의 그 어느 놈도 감히 우리들이ㅡ 토지에 손까락 하나 까딱대지 못할 것입니다. 이 토지소유권 증명서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쓴 11자의 문자가 똑똑히 기록돼 있읍니다. 국가가 보장하여주는 영원히 보전할 이 권리를 여러분과 우리들은 충분히 향유함으로써 그 결과를 나라에 보답해 줄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매개 농민들에게 개별적으로 소유권증명서가 교부될 때마다 전체 농민들은 들끓는 박수로 자기 자신들을 축복하였다. 논문서를 손아귀에 들어 쥐는 농민들의 혈관 속에는 “토지”와 “농민”과 “공화국”을 연결하는 굳세인 뉴대가 힘차게 약동해 용솟음치는 것 같았다. 이 감격과 흥분을 이기지 못해 20여 년 동안을 머슴살이로 살아온 김유복씨는 『나는 1천□백 평의 토지를 분여 받았는데 난생 처음으로 그것도 나라에서 주는 논문서를 쥐고 보니 가슴이 벅차서 무어라 말할 수 없습니다. 해방 전 지주놈들은 논문서만 가지면 우리들 농민을 종같이 부리는 문서로 알었지만 이 문서는 착취가 없고 나 자신과 나라를 배부르게 하는 거룩한 문서입니다. 나는 이 마음을 표시하기 위하여 얼마 안되나마 내가 가지고 있는 돈 5백원을 비행기를 사는데 바치겠습니다.』라고 웨치면서 소중히 간직하였던 지전5백원을 내놓았다. 다 같이 벅찬 감격을 어떻게 표시했으면 좋을지 모르던 등촌리 전체 농민들은 김유복 농민의 이와 같은 적절하고도 솔선적인 애국열성에 감동되어 마치 가쳤던 물이 보를 끊고 터져흐르듯 나도나도하고 군기헌금과 군사원호물자를 내놓았다. 이리하여 순식간에 5천6백원의 군 기금이 거출되였으며 닭 세 마리 계란 마흔개 간장6되 마늘10개 등 기타 많은 식물들이 모여들었다. 농민총회는 단합된 농민들의 환희와 열광 속에 이렇듯 지성한 정성이 엉키어 새 생활로 잡다든 농민들의 결의와 기쁨을 유감없이 발로하면서 쓰딸린 대원수에게 드리는 멧세―지와 인민군대에게 보내는 편지를 채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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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 시기 「해방일보」에 실린 이 기사 역시 김포군 양동면 등촌리, 즉 오늘날 서울 강서구 등촌동 일대를 무대로 한 토지개혁 선전의 전형적인 사례다. 이 글은 단순히 토지 분배 사실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토지소유권 증명서 교부’라는 장면을 중심으로 농민의 감정과 집단적 열광을 극대화하여 체제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사에 따르면 등촌리에서는 고용농, 토지 없는 농가, 토지 적은 농가 등 총 100여 호에 가까운 농민들이 토지를 분배받았고, 이어 그 토지에 대한 법적 권리를 보장하는 ‘소유권 증명서’가 교부되었다. 이 과정에서 농민총회가 열리고, 농촌위원장 박삼석의 연설과 함께 토지개혁이 과거의 ‘착취적 토지관계’를 완전히 청산한 사건으로 선언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토지 자체보다도 ‘문서’다. 기사에서 반복되는 ‘논문서’, ‘소유권 증명서’는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농민이 국가와 직접 연결되는 상징적 매개로 강조된다. 즉 강서구 일대 농민은 더 이상 지주와의 관계 속에 놓인 존재가 아니라, 국가가 보장하는 권리를 가진 주체로 재구성된다.
그러나 이 서사는 철저히 정치적으로 조직된 감정의 연출에 가깝다. 김유복이라는 농민이 20년 머슴살이 끝에 토지를 받고 감격해 500원을 군자금으로 헌납하는 장면, 그리고 이에 동조하여 마을 전체가 군기금과 물자를 쏟아내는 장면은, 토지개혁이 곧 체제 충성과 전쟁 동원으로 이어진다는 구조를 명확히 드러낸다. 즉 ‘토지 → 감사 → 헌납 → 전쟁 참여’라는 연결고리가 만들어지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농민 해방 서사가 아니라 전시 체제의 동원 논리 그 자체다.
이 내용을 강서구의 역사와 연결해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등촌리를 포함한 양동면 일대는 일제강점기까지 소작 중심 농업 구조가 유지되던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다. 지주-소작 관계 속에서 농민이 토지에 대한 권리를 갖지 못했던 현실은 분명 존재했고, 이런 배경이 토지개혁 서사의 설득력을 높이는 기반이 된다. 그러나 이 문서는 그 현실을 단순히 개선의 문제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특정 체제—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만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로 설정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농민에게 요구되는 것은 생산 증대가 아니라 곧바로 군자금 헌납과 전쟁 지원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이 문서가 기록하고 있는 강서구의 시간적 위치다. 여기서의 등촌리는 여전히 ‘농민’과 ‘토지’가 중심인 공간이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이 지역이 곧 김포공항 건설과 도시 확장을 거치며 농촌에서 도시로 급격히 전환된다. 즉 이 문서는 강서구가 도시로 재편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농업 공동체로 존재하던 시기의 모습을 포착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현실 그대로 기록하기보다는 정치적 목적에 맞게 재구성하고 있다.
결국 이 자료에서 강서구는 단순한 지역 사례가 아니라, 식민지 농업 구조의 해체, 전쟁기 체제 선전, 그리고 이후 사라질 농촌 사회의 마지막 단면이 겹쳐진 공간으로 읽힌다. 토지소유권 증명서라는 문서는 단순한 권리의 보장이 아니라, 농민을 국가와 직접 결속시키는 도구였고, 등촌리 농민들의 환희는 자발적 감정보다 체제 서사 속에서 조직된 감정에 가깝다. 이 점에서 이 문서는 강서구가 어떻게 ‘농민의 땅’에서 ‘정치의 공간’으로 전환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