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명 해방일보
대표표제어 해방일보_1950_0825_02
자료구분 문서(노획문서)
언어 국문
국내소장처 이화여대(사업팀)
권호 55
발생소(지역) 서울시
발행사 해방일보사
필자(소속)
지명 서울시, 고양군, 은평면, 김포군, 양동면, 둥천리, 뚝도면, 양독면, 등처리, 시흥군, 과천면, 하리
인명 최고인민회의, 인민군, 조선중앙통신
사건명 토지개혁, 8·15해방 5주년, 8·15해방, 2·7, 5·10
원문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 의거한 토지개혁의 실시로 떳떳한 땅의 주인공이 된 서울시 주변 농민들은 자기들의 행복을 구하면서 식량 증산과 전선 원호에 씩씩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7월 4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토지개혁에 관한 정령이 발표되자 농민들은 끓어 넘치는 환희로써 이를 지지하며 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하여 전체 력량을 기울렸다. 이리하여 토지개혁에 관한 정령 발표 후 불과 한 달 후에는 농민들에게 토지가 분여되였으며 8·15해방 5주년 기념일을 농민들은 토지를 찾은 무한한 감격과 기쁨 속에서 맞이하였다. 고양군 은평면에서는 2만8천□백 평의 토지를 몰수하여 72호의 농가에 분여되였다. 김포군 양동면 둥천리에서는 16만6천□백20평의 토지를 몰수하여 1백□9호의 고용농 토지 없는 농민 토지 적은 농민들에게 분여되였다. 이 결과 둥천리에 거주하는 농민 허간 씨는 9백50평을 받아 종래의 자기 토지와 합하여 3천50평의 전답을 갖게 되였으며 고용농 겸 소작농 송선봉 씨는 종래의 소작지 1천7백 평과 새로 1천5백 평의 땅을 받았다. 고양군 뚝도면 면□리의 고용농 권면석 씨에게는 1천5백 평의 땅이 분여되였다. 이렇게 농민들은 수 세기 동안의 자기들의 숙망이던 토지를 찾게 되였다. 고양군 뚝도면 면□리의 전체 농가는 최고 1만 평으로부터 최저 1천□백 평의 토지를 분여받았다. 그러나 과거 역도 리승만 통치에서 농민들의 생활은 암담하였고 비참하였다. 미제와 그의 주구 리승만 도당은 일제의 봉건적 토지 관계를 유지 강화하였을뿐더러 가렴잡세 기부금 강제 공출로 그들을 기아에 몰아넣었다. 아홉 식구를 데리고 겨우 2천 평의 땅을 자작하던 김포군 양독면 등처리 농민 허간 씨는 1만5천 원에 달하는 세금과 5천여 원의 기부금 그 외에 11가마니의 강제 공출 등으로 수확의 거의 전부를 강탈당하였다. 같은 동리에 사는 고용농 겸 소작농민 송선봉 씨는 전답 1천7백 평에서 15가마니의 쌀과 잡곡을 생산하였는데 그중 5가마니를 소작료로 빼앗기고 남은 열 가마니를 가지고 3천 원의 세금과 기부금 등을 물고 나면 1년 식량의 반도 못 되였다. 시흥군 과천면 하리의 소작농 황봉주 씨는 6백 평의 논에서 쌀 정곡 3가마니 밭 5백 평에서 잡곡 3가마니를 수확하였는데 그중 쌀 한 가마니와 잡곡 한 가마니를 소작료로 제하고 나머지 2가마니를 가지고 일 년을 살어가야 했다. 그리하여 황봉주 농민은 품파리를 하여가며 초근목피로 겨우 연명하여가면서도 불과 2년 동안에 3만 원이란 거액의 고리대금을 질머지게 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참한 생활을 농민들은 그저 순순히 감수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2·7 구국투쟁 5·10 망국단선 반대투쟁 등에 수많은 남반부 농민들은 궐기하였다. 땅과 자유를 찾기 위하여 농민들은 싸웠다. 이러한 치렬한 싸움 속에서 농민들은 영용한 인민군의 진격에 의하여 해방되였으며 공화국 정부의 올바른 시책으로 토지를 찾게 되였다. 토지를 찾은 농민들은 지금 자기들의 행복을 구가하면서 자기의 생활 향상을 위하여 헌신 분투하고 있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토지의 주인공이 되고 자기들이 노력만 한다면 먹고 살 수 있고 생활을 급진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는 광명에 찬 전망 가운데서 모―든 열성을 증산에 기울이고 있다. (조선중앙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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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25일자 「해방일보」에 실린 이 문서는 한국전쟁기 북한 측 선전 매체가 작성한 기사로, 김포군 양동면—오늘날 서울 강서구 일대—를 포함한 서울 주변 농촌 지역에서의 토지개혁을 ‘해방’의 서사로 재구성하고 있다. 이 글에서 반복되는 핵심은 ‘무상몰수·무상분배’라는 원칙을 통해 농민이 비로소 땅의 주인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특히 김포군 양동면, 즉 현재의 등촌동·방화동·개화동 일대로 이어지는 공간이 구체적인 사례로 제시되며, 이 지역 농민들이 토지를 분배받고 삶이 개선되었다는 서사가 강조된다.
문서에 따르면 양동면에서는 약 16만 평이 넘는 토지가 몰수되어 백여 호의 농가에 분배되었고, 허간·송선봉과 같은 인물들은 기존의 소작지에 더해 추가 토지를 받으며 생존 기반을 확보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 서술은 단순한 지역 상황 보고라기보다, 전쟁 상황 속에서 북한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구성에 가깝다. 같은 인물이 ‘둥천리’와 ‘등처리’ 등 서로 다른 지명으로 반복 등장하는 점, ‘양독면’과 같은 비정상적 행정명칭이 혼재된 점은 이 문서가 현장 기록이라기보다 선전 목적에 따라 급하게 작성된 자료임을 보여준다. 실제로 ‘둥천리’는 존재하지 않는 지명이며, 문맥상 현재 강서구 등촌동에 해당하는 ‘등촌리’의 오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문서를 강서구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더 중요한 의미가 드러난다. 일제강점기부터 김포군 양동면 일대는 소작농 중심의 농업 구조가 강하게 유지되던 지역이었다.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 속에서 생산물의 상당 부분이 소작료와 세금, 공출로 빠져나가는 구조가 형성되어 있었고, 이는 문서가 강조하는 ‘착취의 기억’과 맞닿아 있다. 북한은 바로 이 구조를 전복했다는 서사를 통해, 강서구 일대를 포함한 서울 서부 농촌을 ‘해방된 공간’으로 재정의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문서는 또 다른 층위를 드러낸다. 강서구는 이후 김포공항 건설과 도시 확장,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급격히 농촌에서 도시로 전환된 지역이다. 즉 이 문서가 전제하고 있는 ‘토지를 기반으로 한 농민 해방’의 서사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불과 수십 년 안에 이 지역은 완전히 다른 도시 구조로 재편된다. 그런 점에서 이 자료는 단순히 북한의 토지개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강서구가 되기 이전 이 지역이 어떤 농업 사회였고, 그 사회가 어떻게 정치적 서사 속에서 소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로 읽힌다.
결국 이 문서에서 강서구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식민지 농촌 구조, 전쟁기 선전, 그리고 이후 도시화 이전의 마지막 농업적 기억이 겹쳐지는 공간이다. 토지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된 변화는 실제 정책의 효과를 넘어서, 특정 체제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역의 현실을 어떻게 재구성했는지를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 점에서 양동면, 즉 오늘날의 강서구는 역사적 사실의 현장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서사의 무대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