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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양천수리조합(陽川水利組合)은 1923년 3월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 가양리를 중심으로 설립된 수리조합으로, 한강 하류 저지대 농업을 유지하기 위해 조직된 식민지 시기 대표적 치수·관개 관리 기구였다. 이 지역은 한강과 지류에 인접한 저지대로, 매년 우기(雨期)마다 홍수와 범람이 반복되는 자연환경 속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안정적인 농업 생산을 위해서는 제방 축조와 배수 시설 정비가 필수적이었다. 수리조합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직된 반공공적 기구였지만, 실제 운영은 식민지 권력과 지주 중심 구조 속에서 이루어졌다.
조합의 설립과 운영 과정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관여한 이중적 권력 구조가 나타난다. 초기에는 신기덕(申基德) 등 조선인이 대표 또는 중역으로 참여했으며, 이후 이대영(李大泳)이 조합장으로 등장하는 한편, 일본인 아라이 하쓰타로(荒井初太郞), 오타니 겐스케(大谷健介) 등도 조합 운영에 관여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는 수리조합이 단순한 지역 조직이 아니라, 식민지 행정과 자본이 결합된 통치 장치였음을 보여준다.
양천수리조합의 핵심 사업은 한강 연안 제방 축조와 배수 체계 구축이었다. 1926년부터 1930년대 초까지 김포 하성면에서 강서구 염창동에 이르는 한강 하류 구간에 제방이 축조되었으며, 양천수리조합 구역만 해도 약 4.4km 구간에 걸쳐 제방이 건설되고 약 600정보의 농경지를 보호하는 몽리면적을 확보했다. 이는 단순한 토목 사업을 넘어, 농업 생산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 인프라 구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은 이상적인 결과만을 낳지 않았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와 같은 대규모 수해는 조합 시설을 무력화시켰고, 실제로 제방 붕괴와 농경지 매몰, 가옥 파괴 등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이후 복구 공사가 진행되었지만, 배수 시설 미비와 제방 설계 문제로 인해 오히려 물이 빠지지 않는 구조가 형성되면서 농작물이 장기간 침수되는 피해가 반복되었다. 이로 인해 조합 구역 내 소작인들의 피해가 극심해졌고, 조합 운영에 대한 불만과 원성이 크게 확산되었다.
특히 조합비 부담과 저임금 노동 문제는 중요한 갈등 요소였다. 복구 공사 과정에서 동원된 농민들은 장시간 노동에도 불구하고 낮은 임금을 받았고, 조합의 비용 구조는 지주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실제로 기록에는 “수리조합이 아니라 수해조합”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할 정도로, 조합의 기능이 농민들에게는 보호가 아니라 부담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주민들은 집회를 열고 총독부에 진정을 제출하는 등 집단적인 대응에 나서기도 했다.
이처럼 양천수리조합은 한편으로는 농업 생산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인프라를 구축하는 조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지 권력과 지주 중심의 이해관계를 반영하여 운영된 통제 기구이기도 했다. 자연재해를 관리하기 위한 기술적 장치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는 구조였던 것이다.
결국 양천수리조합(陽川水利組合)은 한강 하류 저지대 농업을 유지하기 위한 치수 조직이자, 식민지 권력·자본·지주와 소작인 간의 이해가 충돌하는 공간으로, 김포·강서 지역의 환경과 경제, 그리고 사회 구조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양천수리조합은 홍수를 통제하기 위해 조직된 치수 기구이면서도, 식민지 권력과 지주 중심 구조 속에서 농민에게는 또 다른 부담과 갈등을 낳은 이중적 성격의 조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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