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연구

양동식산(陽東殖産)

운영자

2026-04-17

양동식산(陽東殖産)은 1910년대 초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陽東面)을 거점으로 설립된 일본인 주도의 농업 개발 회사로, 일제강점기 식민지 토지 정책과 금융 구조가 결합된 전형적인 기업 형태를 보여준다. 초기에는 자본금 10만 엔 규모로 출발해 토지 개간과 과수·채소 재배, 식림(植林), 목축 등을 사업 목적으로 내세웠지만, 이는 단순한 농업 경영이 아니라 국유미간지(國有未墾地)를 확보하여 생산 가능한 농지로 전환하는 식민지형 토지 개발 사업이었다. 1922년 주식회사로 전환되면서 자본금을 100만 엔으로 대폭 증자하고 납입 자본도 25만 엔으로 확대함으로써 회사는 본격적인 대규모 개발 단계에 진입했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국유미간지 대부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양동식산은 양동면 일대의 국유미간지 두 곳을 대부받아 사업을 전개했는데, 그 규모는 각각 205.5정보와 35.8정보에 달했다. 이는 단순한 경작을 넘어 지역의 토지 이용 구조 자체를 재편할 수 있는 수준의 대규모 개발이었다. 그러나 양동면은 한강 하류의 저지대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수해(水害)와 해일(海溢)이 반복되는 지역이었고, 실제 사업지 역시 지속적인 침수 피해를 겪으며 안정적인 농업 생산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이로 인해 회사는 경영난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으로부터 자금을 융자받는다. 이 과정에서 국유미간지에 대한 ‘이용권(利用權)’이 담보로 설정되었는데, 이는 토지 소유권이 아닌 개발 권리 자체가 금융 자산으로 기능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식민지 토지 정책과 금융 시스템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음을 드러낸다.

 

이 회사의 성격은 경영진과 대주주 구성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주요 인물인 고바야시 초베에(小林長兵衛)는 단순한 농업 경영자가 아니라 토목·건축·철도·광업을 넘나드는 식민지 산업 자본가였다. 1878년 일본 효고현 출신인 그는 일본의 토목회사 미야자키구미(宮崎組)에서 지배인으로 활동하며 군항 건설과 각종 토목공사를 수행한 뒤, 1905년 조선으로 건너와 철도 공사에 참여했다. 이후 독립하여 고바야시구미(小林組)를 설립하고 기반 시설 건설 사업을 확장했으며, 동시에 농업 경영에도 참여하고 가메와리 야스조(龜割安藏) 등과 함께 다양한 산업 분야에 공동으로 투자하며 자본을 축적해 나갔다.

 

그의 활동은 농업에 국한되지 않았다. 조선제련주식회사 설립과 운영에 관여하고, 1936년에는 자본금 1,000만 원 규모의 일본 고주파중공업주식회사 설립에 대표로 참여하는 등 중공업 분야까지 활동 영역을 확장했다. 조선제련주식회사가 해방 이후 삼성광업을 거쳐 한국광업제련공사(韓國鑛業製鍊公社)로 이어지는 계보를 갖는다는 점에서, 그는 식민지 산업 구조 전반에 깊숙이 연결된 핵심 자본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930년대 후반 경영진에 오타니 시젠(大谷志善)과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양동식산이 단일 기업이 아니라 자본과 인적 네트워크가 지속적으로 재편되며 확장되는 구조 속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양동식산은 개별 농업 회사라기보다, 토지 개발을 기반으로 철도·건설·광업·중공업으로 이어지는 식민지 자본 네트워크의 출발점에 위치한 기업이었다. 농업 개발은 단순한 식량 생산을 넘어 토지 확보와 공간 장악의 과정이었고, 이를 통해 축적된 자본과 인적 네트워크는 다른 산업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반복되는 수해 속에서도 금융 자본에 의존해 사업을 유지하고, ‘이용권’이라는 제도를 통해 자산을 유동화하는 구조는 식민지 개발이 자연환경, 국가 권력, 자본이 복합적으로 얽힌 체계 위에서 이루어졌음을 잘 보여준다.

 

양동식산(陽東殖産)은 국유미간지 이용권을 기반으로 토지를 개발하고 금융과 결합해 자본을 확장하며, 건설·광업·중공업으로 이어지는 식민지 산업 네트워크의 기초를 형성한 농업 개발 기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