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출처 - 국가유산포털
우성전(禹性傳, 1542~1593, 본관 단양(丹陽), 자 경선(景善), 호 연암·추연(淵庵·秋淵), 시호 문강(文康))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기 의병장으로, 강화와 경기 일대에서 의병을 규합해 행주대첩을 지원한 인물이다. 그는 우환의 증손으로 태어나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문관 검열, 봉교, 수찬 등을 거쳐 관직에 나아갔다. 1576년에는 수원현감으로 나가 명망을 얻었고, 이후 장령, 사옹원정, 응교, 의정부 사인 등을 지냈다.
정치적으로는 동인 계열 인물이었다. 뒤에 이발과의 갈등을 계기로 남인 쪽의 거두로 분류되었고, 정철 문제를 둘러싼 당쟁 속에서 1591년 관직을 삭탈당했다. 하지만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곧 풀려나와 경기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했다. 실록은 “전 사성 우성전이 의병을 일으키자 경기 안의 사민이 많이 따랐고, 군사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적고 있다. 이는 우성전이 단순한 지방 유생 지도자가 아니라, 경기권 민심과 인적 네트워크를 실제로 동원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전쟁기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강화도와 한강 하류 전선이다. 그는 강화도로 들어가 김천일과 연합했고, 이 연합 의병은 왜군의 수로 이동과 보급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우성전이 강화도를 장악해 남북 교통을 열고 전공을 세웠다고 정리한다. 이 점에서 우성전은 단순히 한 전투에 참가한 인물이 아니라, 임진왜란기 한강·강화 해역 전선의 유지에 관여한 경기권 의병장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또한 그는 행주대첩을 지원한 인물로 평가된다. 다만 여기서 구분이 필요하다. 공신력 있는 인명사전 자료는 우성전이 경기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강화에서 김천일과 합세해 전공을 세웠다고 서술하지만, 사용자가 제시한 “가양동 궁산 양천고성지에 주둔하여 행주산성 전투에 협공했다”는 수준의 구체적 동선은 주요 사료와 인명사전에서는 직접 확인되지 않았다. 강서구청 문화관광 사이트는 우성전을 ‘그 외 강서 인물’로 분류하며 행주대첩 참가를 적고 있지만, 그 근거가 출생지나 세거지가 아니라 임진왜란기 경기·강화·행주 전선 활동에 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따라서 우성전과 강서의 관계는 직접 연고 인물이라기보다, 양천·행주·강화로 이어지는 전쟁 공간과 관련된 간접적 인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
우성전은 학자이기도 했다.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성리학 저술을 남겼고, 그의 저작 일부는 후대에 『소대수언』 같은 책에 수록되었다. 이는 그가 단지 전란기 의병장으로만 기억될 인물이 아니라, 조선 중후기 남인 계열 학문과 정치 문화를 함께 보여 주는 문신이었다는 점을 뜻한다.
결국 우성전은 조선 중기 당쟁 속에서 밀려났다가, 국가가 무너지는 순간 경기의 의병을 일으켜 다시 역사 전면에 등장한 인물이다. 그는 김천일처럼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의병장은 아니지만, 경기 내 의병을 규합하고 강화와 한강 하류를 연결하는 전선에서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서울 강서구와의 관계 역시 출생·묘소·세거가 아니라, 임진왜란기 양천·행주·강화 전선이라는 역사적 공간을 매개로 형성된 관계로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