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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책 52 면 (우측) 4 단 3 행
출처 - 한국학 자료센터
엄집(嚴緝, 1635~1710, 本貫(寧越), 字(敬止), 號(晩悔), 諡號(貞憲))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삼사와 승정원, 의정부를 두루 거치며 청렴성과 강직한 언론 활동으로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감찰 엄성구의 아들로 태어나 영월엄씨 가문에서 성장했으며, 1673년(현종 1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관직에 나아갔다. 이후 사간원 정언, 홍문관 부교리, 사헌부 집의, 사간원 사간, 승정원 승지 등 이른바 삼사(三司)의 청요직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언론 관료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그의 관직 경력은 중앙 정치의 핵심을 관통한다. 삼사에서 언론 기능을 수행한 뒤, 개성부유수와 도승지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고, 이후 의정부 좌참찬과 예조판서를 역임하며 고위 관료로 자리 잡았다. 특히 1701년 공조판서 재직 시에는 장희빈(張禧嬪)의 처벌을 강하게 주장한 것으로 기록되는데, 이는 당시 정치적 긴장 속에서 왕실 문제에 직접 개입한 중요한 사례다.
엄집의 인물됨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청렴성과 기개였다. 그는 권세 있는 집안을 멀리하고 당쟁을 싫어하는 태도를 유지했으며, 언관으로서의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면서도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청렴하고 근신하여 스스로를 단속하였다”는 평가가 남아 있으며, 만년에 병으로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약조차 구하지 못하자 왕이 직접 약을 하사했다는 일화는 그의 청빈한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치적으로 그는 특정 붕당에 깊이 결속되기보다 비교적 중립적이고 원칙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한 인물로 평가된다. 당쟁이 격화되던 숙종 대 정치 환경 속에서도 권력 다툼에 적극 가담하기보다는 언론 기능과 행정 역할에 충실했으며, 이러한 점이 후대에 “기개 있고 청렴한 인물”이라는 평가로 이어졌다.
다만 그의 이력 가운데 일부는 사료적으로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전라도관찰사, 형조판서, 대사간 등의 관직은 현재 확인되는 주요 자료에서 직접적으로 확인되지 않으며, 비교적 확실하게 확인되는 핵심 관직은 도승지, 공조판서, 예조판서, 좌참찬, 우참찬 등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관직 경력은 일정 부분 후대 서술 과정에서 확장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강서 지역과의 관계 역시 신중하게 볼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 확인되는 공신력 있는 자료를 기준으로 보면, 엄집이 서울 강서구 또는 조선시대 양천현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인물이라는 명확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부평부사를 지낸 바 있는데, 당시 부평부는 오늘날 인천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한강 서남부와 생활권이 일부 겹치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행정권역의 인접성을 근거로 서울 서남권 인물로 확장해 해석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직접적인 연고라기보다 행정적 범위에 기반한 간접적 연결에 가깝다.
엄집은 조선 후기 정치사의 중심에서 활동한 인물이지만, 강서 지역과의 관계는 직접적이라기보다 제한적이고 간접적인 수준에 머문다. 따라서 그를 강서 지역 인물로 단정하기보다는, 삼사와 중앙 관료 체계 속에서 청렴성과 원칙을 지킨 언론 관료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평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