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심사순(沈思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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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16

심사순묘갈(沈思順墓碣)
출처 -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심사순(沈思順, 1496~1531, 본관 풍산(豊山))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심정(沈貞)의 아들이자 심사손(沈思遜)의 아우이며, 개화산 일대 풍산심씨 묘역에 분묘가 남아 있는 인물이다. 현재 공신력 있는 인명사전급 자료에서는 심사순 단독 항목이 거의 확인되지 않아, 그의 생애는 주로 관련 사건 기사와 묘역 자료를 통해 복원된다. 서울 강서구 방화동의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에는 심정, 심사손, 심사순, 심수경의 묘와 석물이 함께 남아 있으며, 심사순은 이 가문의 핵심 계열 인물로 지역 문화유산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는 1517년(중종 12) 별시문과에 급제했다는 전승이 널리 알려져 있고, 부제학과 사가독서를 거쳤다는 서술도 향토 자료와 가문 계통 서술에서 반복된다. 다만 이번에 확인한 주요 공적 웹 자료에서는 이 초기 관력과 사가독서 사실을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전통적 인물 서술로는 널리 쓰이지만, 엄밀하게는 추가 검증이 필요한 대목이다. 현재까지 비교적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은 그가 1531년 종루 궤서 사건과 연결되어 국문을 받았다는 점이다.

1531년 중종 26년에 종루에 익명의 방문이 붙어 사림을 비방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당시 대간은 그 필적과 문법이 심사순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종은 처음부터 무조건 단정한 것이 아니라, 대신들이 익명서 처리에는 신중해야 한다고 한 의견을 들은 뒤에도, 이번 사건은 일반적인 익명서와 달리 필적이 분명하다고 하여 심사순을 추고하도록 명했다. 이 기록은 심사순이 단순히 풍문으로만 거론된 것이 아니라, 실제 국문 대상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

또 다른 자료에서는 홍우세(洪佑世)가 바로 이 사건에서 심정·심사순 부자와 같은 일당으로 몰려 국문을 받았다고 정리한다. 이는 심사순이 단독 인물이 아니라, 아버지 심정과 함께 기묘사화 이후의 훈구계 정치 세력으로 인식되었음을 뜻한다. 즉 심사순은 단순한 문신이 아니라, 조광조 숙청 이후 이어진 훈구 권력의 연장선 위에서 이해해야 하는 인물이다.

이런 점에서 심사순의 삶은 아버지 심정의 정치적 부침과 떼어놓고 보기 어렵다. 심정이 기묘사화를 주도한 핵심 권신이었던 만큼, 심사순 역시 그 후광과 부담을 동시에 짊어진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종루 궤서 사건에서 그의 필적이 문제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조정이 그를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이미 의심받는 권문세가의 일원으로 보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1531년은 바로 심정이 실각하고 사사되는 해이기도 하므로, 심사순의 국문과 죽음은 한 개인의 몰락이 아니라 풍산심씨 권력 계열 전체가 무너지는 과정의 일부로 읽힌다.

정리하면, 심사순은 조선 전기 중종 대의 문신이지만, 오늘날에는 독자적 업적보다 심정의 아들이자 기묘사화 이후 훈구 정치의 잔영 속에서 종루 궤서 사건에 연루된 인물로 더 분명하게 남아 있다. 동시에 그의 묘가 개화산 풍산심씨 묘역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는 강서 지역에 실물 흔적이 남아 있는 조선 전기 정치 가문의 한 축이기도 하다. 현재 단계에서 가장 안전한 평가는 이렇다. 심사순은 문신이었으나, 후대에는 정치적 명성보다 사건과 가문, 그리고 묘역을 통해 기억되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