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심정(沈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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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16

심정묘갈(沈貞墓碣)
출처 - 국가유산 지식이음


심정(沈貞, 1471~1531, 본관 풍산(豊山), 자 정지(貞之), 호 소요정(逍遙亭), 시호 문정(文靖))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中宗反正의 공신이자 이후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주도한 권신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그는 단순한 대신이 아니라, 연산군 말의 정국 전환과 중종 대 사림 숙청이라는 두 개의 큰 정치 변곡점에 모두 깊이 개입한 인물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를 수찬·좌의정을 지낸 문신으로 정리하며, 관련 사건으로 중종반정과 기묘사화를 함께 든다.

그는 풍산심씨 가문 출신으로, 적개공신 심응의 아들이자 심사손·심사순·심수경으로 이어지는 강서 지역 풍산 심씨 계열의 중심 인물이다. 149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2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이듬해 수찬에 임명되며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해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화천군(花川君)에 봉해지면서 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했다. 이 반정 참여는 그의 정치 경력에서 결정적 계기였고, 이후 그는 반정 공신 세력의 일원으로서 조정 내 영향력을 넓혀 갔다.

그러나 그의 정치 행보는 곧바로 논란과 결부되었다. 1507년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온 뒤 남곤·김극성 등과 함께 김공저·조광보를 제거하기 위한 옥사를 일으켜 이미 인망을 잃기 시작했고, 1515년 이조판서에 올랐다가 삼사의 탄핵으로 물러났다. 1518년 다시 형조판서 물망에 올랐으나,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신진 사류가 그를 소인으로 지목하며 강하게 반대해 임명되지 못했다. 이 무렵 한강변에 정자를 지어 울분을 달랬다는 기록이 남는데, 여기서 말하는 정자가 곧 그의 호와도 연결되는 逍遙亭이다. 이는 이후 그의 정치적 원한과 사류에 대한 적대감이 깊어지는 배경으로 이해된다.

그의 이름이 조선 정치사에서 가장 크게 남는 이유는 단연 1519년의 기묘사화(己卯士禍) 때문이다. 조광조 등이 위훈삭제를 요구하며 반정공신 세력을 압박하자, 심정은 경빈 박씨를 통로로 “조씨전국(趙氏專國, 조씨(조광조)가 나라를 독점하고 있다.)”이라는 말을 궁중에 퍼뜨리고 남곤·홍경주 등과 결합해 왕을 움직였다. 그 결과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이 대거 제거되었고, 심정은 남곤과 함께 정권을 장악했다. 이 때문에 후대 사림의 시각에서 그는 간신과 소인의 대표로 규정되었으며, 남곤과 함께 ‘곤정(袞貞,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을 함께 묶어 부르는 표현)’으로 묶여 오래도록 비판받았다.

기묘사화 이후 그는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올라갔다. 1527년 우의정과 좌의정에 이르고 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수하에 이항과 김극핍을 두고 권력을 독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동궁과 인척 관계에 있는 김안로를 귀양 보낼 정도로 한때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권력은 오래 가지 않았다. 경빈 박씨의 동궁 저주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관련 사실이 드러나자, 김안로의 사주를 받은 대사헌 김근사와 대사간 권예의 탄핵으로 강서에 유배되었고, 결국 辛卯三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1531년 사사되었다.

심정을 둘러싼 강서 지역의 흔적은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 있다. 서울 강서구 방화동 개화산 동쪽 기슭에는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이 남아 있으며, 이곳에는 심정과 아들 심사손·심사순, 손자 심수경의 묘와 묘비·상석 등이 함께 자리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풍산심씨 묘역’ 항목은 이 묘역이 약 50여 기의 풍산 심씨 분묘가 모여 있는 집성촌성 묘역이며, 심정이 개화산 근처에 소요정(逍遙亭)을 짓고 일가를 이루어 살았다고 적고 있다. 또 심정의 묘갈은 1579년에 세워졌고, 비문은 손자 심수경이 짓고 증손자 심일취가 썼다고 전한다. 위치는 현재 행정구역상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 산152-1이다.

결국 심정은 두 얼굴을 가진 인물이다. 한편으로 그는 중종반정의 공신이자 재상에까지 오른 유능한 권력가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림을 숙청한 조선 전기 훈구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의 삶은 단순한 개인의 흥망성쇠가 아니라, 연산군 말의 정변 정치와 중종 대 훈구·사림 갈등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압축된 사례다. 그리고 강서의 개화산 묘역은 그 거대한 정치사의 흔적이 오늘의 지역 공간 안에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보여주는 현장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