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김덕원(金德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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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16

김덕원묘 출토 의복 일괄 (金德遠墓 出土 衣服 一括)
사진출처 - 국가유산포털



김덕원(金德遠, 1634~1704, 본관 원주, 자장(子長), 호는 휴곡(休谷))은 조선 후기 붕당 정치의 격변기 속에서 중앙 정계와 지방 행정을 모두 경험한 문신으로, 특히 숙종 대 환국 정치의 한복판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병마절도사 김준룡의 손자로 태어나 원주김씨 무반 계열의 기반 위에서 성장했으며, 가문적으로는 무신 전통을 이어받았지만 개인의 진로는 문과 관료로 전환된 사례에 해당한다.

1662년(현종 3)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그는 승문원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사헌부지평과 사간원정언을 거치며 언관으로서 활동했다. 언관은 왕권과 대신을 견제하는 비판 기능을 담당하는 자리였는데, 김덕원은 이 시기부터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는 인물이었다. 그는 남인 계열 가운데에서도 허목을 중심으로 한 청남 계열에 속해 당시 권신 허적의 비리를 공격하며 정치적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의 정치적 행보는 조선 후기 환국 정치와 긴밀히 연결된다. 경신환국 이전 남인 정권 하에서 활동하던 그는, 이후 정권 교체 속에서도 병조참판·형조참판·한성부판윤·경기감사·예조판서 등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는 단순한 정파 인물이 아니라 행정 능력과 실무 능력을 동시에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특히 그는 중앙 행정뿐 아니라 지방 통치에서도 경험을 쌓으며, 조선 후기 관료가 요구받던 “정책 실행형 관료”의 전형적인 경로를 보여준다.

숙종 대에 이르러 그는 정치의 중심으로 진입한다. 기사환국(1689) 이후 남인이 재집권하자 우의정에 임명되어 정국 운영의 핵심에 서게 되었고, 실질적인 행정 업무를 총괄하는 위치에 올랐다. 그러나 이 시기 그의 행보는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정국의 격변 속에서 김수항 등 서인 인물들이 제거되는 과정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후 노론 세력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는 조선 후기 환국 정치의 특징인 “정권 교체와 숙청” 구조 속에서 고위 관료가 겪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후 갑술환국(1694)이 일어나 정권이 다시 교체되자, 그는 이에 반대하다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이후 해남으로 이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이 과정은 그가 단순히 권력에 순응한 인물이 아니라, 일정한 정치적 입장을 유지했던 관료였음을 보여준다. 말년에는 황해도 해주에서 생을 마쳤으며, 1711년에 이르러 신원이 회복되었다.

김덕원을 이해할 때 중요한 지점은 세 가지다. 첫째, 그는 무신 가문 출신이면서도 문과 관료로 전환된 사례로, 조선 후기 양반가의 계열 이동을 보여준다. 둘째, 환국 정치라는 극단적인 권력 재편 구조 속에서 고위 관료로 활동하며 정치적 부침을 겪은 인물이다. 셋째, 중앙과 지방을 오가며 행정 경험을 축적한 실무형 대신이었다는 점이다.

한편 지역사적으로 그의 의미는 또 다른 층위에서 드러난다. 사용자 자료에서 언급된 강서구 능곡 일대 묘역과 출토 복식은 매우 중요한 문화사적 자료다. 실제로 그의 묘에서 출토된 복식 유물은 조선 후기 상류층 의복 연구의 핵심 자료로 평가되며, 의생활·신분·직물 기술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복식”이라는 표현은 과장일 가능성이 높고, 정확히는 조선 후기 상류층 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그의 묘역이 화곡동 일대에 존재했다가 1970년대 도시 개발 과정에서 이장한 것은 강서 지역의 급격한 도시화 과정과 맞물려, 지역 기억이 물리적으로 이동·해체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다. 

결국 김덕원은 단순한 고위 관료가 아니다. 그는 조선 후기 정치 구조의 중심에서 권력 교체와 행정 운영을 동시에 경험한 인물이자, 무신 가문에서 문신으로 전환된 계열 이동의 사례이며, 동시에 강서 지역에 물리적 흔적을 남긴 역사 인물이다. 그의 삶은 개인의 성공 서사라기보다, 조선 후기 국가 운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구조로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