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김응남(金應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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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16

보물 김응남 호성공신 교서 및 관련 고문서(2012년 국보,보물 지정보고서)
사진 출서 - 국가유산포털


김응남(金應南, 1546~1598, 자는 중숙(重叔), 호는 두암(斗巖), 시호는 충정(忠靖), 본관은 원주(原州))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혼란 속에서 조정의 중심을 지탱한 대신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를 한성판윤, 병조판서 겸 부체찰사, 좌의정 등을 지낸 문신·공신으로 정리하고 있으며, 출생지는 양천현 계열로 전해져 오늘날 서울 강서구 일대의 지역사와도 연결해 기억된다.

 

그는 156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인 1568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예문관과 홍문관의 정자로 관직에 나아갔다. 이후 사가독서를 할 만큼 문장과 학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승정원과 삼사, 홍문관을 두루 거치며 중앙 정계에서 빠르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의 정치적 부침은 1583년 뚜렷하게 나타난다. 병조판서 이이를 탄핵한 삼사의 인물들과 한편이라는 혐의를 받아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는데, 백과사전은 그가 실제로는 삼사의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제주에 부임한 뒤 기민을 구휼하고 교육을 진흥하며 민속을 바로잡는 데 힘써 선정을 베푼 목사로 기억되었고, 2년 뒤 우승지로 다시 기용되었다고 전한다. 

 

이후 김응남은 대사헌, 대사간, 부제학,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며 조정의 핵심 문신으로 성장했다. 1591년에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는데, 당시 명 조정 내부에는 조선이 일본과 내통한다는 의심이 퍼져 있었다. 김응남은 현지에서 이 의혹을 적극 해명해 명 조정의 의구심을 풀기 위해 힘썼고, 이는 임진왜란 직전 조선이 처한 외교적 긴장과 국제 정세를 보여 주는 중요한 장면으로 평가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유성룡의 천거로 병조판서 겸 부체찰사에 임명되어, 피난길에 오른 선조를 수행하며 전쟁 초기 국정을 수습했다. 이어 1593년 이조판서, 1594년 우의정, 1595년 좌의정에 올라 유성룡과 함께 전후의 혼란한 정국을 안정시키는 중심 인물이 되었다. 특히 그는 나라를 다시 세우는 급선무가 군사 훈련과 성곽 축조보다 먼저 인심을 바로잡는 데 있다고 강조했는데, 이 말은 전란기의 조선이 단지 군사 문제만이 아니라 민심과 정치 질서의 붕괴를 함께 겪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에는 안무사로 영남 지방에 내려가 전란 피해를 수습하던 중 풍기에서 병이 깊어졌고, 귀경 뒤 관직에서 물러난 다음 1598년 세상을 떠났다. 사후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어 원성부원군에 추봉되었고, 시호는 충정이 내려졌다. 

 

김응남은 정치가로만 머문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충청도병마절도사 김말손의 증손으로서 가문적 기반을 지녔고, 문장과 학문, 서예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조선 중기의 전서체 계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으로 거론되며, 그의 이름은 정치사뿐 아니라 문예사의 맥락에서도 함께 언급된다. 

 

김응남은 전란기의 조선을 군사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치적·행정적으로 붙들어 세운 인물이었다. 그는 강한 당쟁 속에서도 중앙 정계와 지방 행정을 모두 경험했고, 제주에서는 목민관으로, 전란기에는 대신으로, 대명 외교에서는 사신으로 역할을 수행했다. 이런 점에서 김응남은 임진왜란기의 영웅 서사에서 자주 가려지지만, 실제로는 조선 국가 운영의 지속성을 떠받친 핵심 관료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화곡4동 능골에 묘가 있었으나, 1972년 3월 30만 단지 조성 사업으로 묘지를 충청남도 천안시 성남면 봉양리로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