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김종태(金鍾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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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16

김종태 그림, 노란 저고리


회산(繪山) 김종태(金鍾泰)
김종태(1906~1935, 호 회산)는 일제강점기 조선 서양화단에서 가장 눈에 띄는 청년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권위 있는 인명·미술사 요약 자료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를 일제강점기 「아이」, 「포오즈」, 「낮잠」 등을 그린 화가로 정리하면서, 1926년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특선을 거쳐 사후 1936년 처음 도입된 추천작가 제도에서 서양화 추천작가로 추대된 인물로 기록한다. 이 점은 중요하다. 김종태를 소개하는 대중적 글 가운데는 선전 회차와 연도를 뒤섞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조선미술전람회가 1922년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1926년은 제5회, 1930년은 제9회, 1933년은 제12회이며, 김종태의 추천작가 추대는 1935년이 아니라 1936년 규정 개정 뒤의 일이다.


확인되는 생애의 출발 
학술 백과는 김종태의 출생지를 경기도 김포로 적고, 그가 경성사범학교를 나와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고 전한다. 한편 오늘의 행정구역과 연결하는 지역사 서술에서는 그 출생지를 현 서울 강서구 마곡동 일대로 더 구체화하며, 1906년 4월 8일 출생이라는 날짜까지 제시한다. 따라서 “김포 출생”은 학술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정보이고, “현재의 강서구 마곡동”이라는 설명은 지역 기억이 덧붙은 현재적 재서술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다만 이 두 층위는 상충한다기보다, 한 인물을 옛 행정구역과 현재 생활권 사이에서 다시 읽는 두 방식에 가깝다. 

김종태의 이력에서 더 눈에 띄는 점은 출발의 방식이다. 동시대 화가 다수가 일본 유학이나 정규 미술학교를 통해 서양화에 입문했던 것과 달리, 최근 연구는 김종태가 독학에 가까운 경로로 서양화의 언어를 스스로 익히며 등장했다고 본다. 그는 교사로 생활하면서도 회화와 글쓰기를 병행했고, 작품 활동뿐 아니라 매체 비평과 문필 활동을 통해 자신의 예술 의식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러므로 김종태의 초기 이력은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천재”라는 낭만적 묘사로만 소비되기보다, 식민지 조선의 제한된 제도 안에서 비제도권 출발의 화가가 어떻게 자신의 언어를 만들었는가라는 문제로 읽는 편이 더 정확하다.


식민지 제도와 선전에서의 돌파 
김종태가 미술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무대는 조선총독부가 운영한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였다. 이 전람회는 1922년부터 1944년까지 총 23회 열렸고, 식민지 문화통치의 제도적 장치 가운데 하나로 기능했다. 즉 선전은 신인 화가의 등용문이면서도, 동시에 일본 중심의 관전 질서와 심사 기준을 조선 화단에 심어 넣는 구조이기도 했다. 김종태의 이력은 바로 이 양면적 제도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는 식민지 제도 안에서 인정받았지만, 그 방식은 단순한 제도 순응이 아니라 제도 내부에서의 변형과 돌파에 가까웠다. 

구체적인 연보를 보면 그의 부상 속도는 놀라울 정도다. 1926년 제5회 선전에서 「자화상」이 입선하며 처음 이름을 알렸고, 1927년 제6회에서는 「아이」가 특선, 「백자와 튜울립」이 입선되었다. 이어 1928년 제7회에서는 「포오즈」가 특선되었고, 그 뒤에도 1929년, 1930년, 1933년, 1935년에 특선을 추가해 선전에서 가장 눈부신 이력을 남긴 작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1936년 선전 규정이 개정되어 추천작가 제도가 도입될 때, 그는 사후에 서양화 추천작가로 추대되었다. 후대 연구가 그를 “최연소 추천작가”로 거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김종태의 선전 경력은 단순한 수상 실적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공적 미술제도 내부에서 비정규 경로의 조선인 화가가 최고 수준의 공인을 획득한 드문 사례로 보아야 한다.


조형 언어의 핵심 
김종태의 화풍을 이해하는 가장 안정적인 출발점은 그의 작업이 인상주의적 모방에서 출발했지만 곧 야수적이고 표현적인 방향으로 이동했다는 점이다. 백과사전은 그의 변화를 “인상파의 아류에서 벗어나 점차 야수적이면서도 표현적인 경향으로 옮겨가는 과정”으로 설명하고, 그 전환이 제7회 선전 특선작 「포오즈」에서 확고한 조형으로 정착한다고 본다. 그러나 김종태를 단순히 “야수파의 영향 아래 있던 화가”로 묶어 버리면 중요한 것이 빠진다. 그의 진짜 성취는 서양의 전위적 형식을 모방한 데 있지 않고, 그것을 조선의 인물과 생활 감각에 맞게 다시 조직한 데 있다.

김종태 회화의 특징은 크게 두 방향에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대담한 구도다. 그는 고전적이고 아카데믹한 안정 구도에서 벗어나 인물을 정면이나 완전 측면에 가까운 상태로 과감하게 배치했고, 배경을 줄이거나 생략해 인물의 존재감 자체를 부각했다. 다른 하나는 묽고 투명한 색조와 날렵한 붓질이다. 백과사전은 그의 터치를 “수묵과도 같은 묽은 색조와 일필로 처리한 터치”라고 설명하는데, 이 표현은 정확하다. तेल감이 두껍고 육중한 유화와 달리, 그의 화면에서는 수채화나 수묵에 가까운 투명감과 속도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이 때문에 김종태의 유화는 서양 유채의 재료를 쓰면서도 동양 회화의 호흡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감각을 남긴다.


남아 있는 작품과 해석의 기준
현존 작품이 드물기 때문에 김종태 해석은 몇 점의 대표작에 크게 의존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1929년작 「노란 저고리」다. 이 그림은 노란 저고리, 붉은 깃과 고름, 어두운 배경의 대비를 통해 인물의 상반신을 강하게 전면화한다. 물감층은 얇고 붓질은 빠르지만, 표정의 응축도는 대단히 높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작품을 야수파·표현주의적 기법으로도 볼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동시에 1936년 김용준이 이 색채를 조선 고유의 맛을 의식적으로 끌어내려는 시도로 해석했다고 정리한다. 곧 「노란 저고리」의 중요성은 단지 원색 대비의 강렬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비가 조선인의 생활색을 회화적 언어로 바꾸어 놓았다는 데 있다.

또 다른 핵심작은 1929년의 「사내아이」, 또는 자료에 따라 「조는 사내아이」로 소개되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낮잠에 빠진 어린 소년을 정면에 가깝게 포착한 인물화인데, 캔버스 위의 유채임에도 수채화처럼 옅고 맑은 질감을 남긴다. 국립현대미술관 소개와 관련 기사들은 이 작품이 극도로 절제된 붓질만으로 아이의 잠든 표정과 몸의 무게를 전달한다고 설명하며, 2021년 이건희 컬렉션 기증을 통해 다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고 평가했다. 특히 국립현대미술관은 이 작품을 “총 4점밖에 전해지지 않는 김종태 유화” 가운데 하나로 소개했다. 이 사실은 김종태 연구가 왜 늘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작품이 적기 때문에 한 점 한 점이 단순한 대표작을 넘어 작가 전체를 해석하는 기준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 드문 유작군 가운데 「석모 주암산」은 김종태 해석을 풍경으로까지 확장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여러 기사와 미술관 전시 정보는 이 그림을 1935년 작, 평양 개인전 무렵 제작된 풍경화로 소개하며, 오늘날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으로 확인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인물화 중심으로 이해되어 온 김종태에게서, 향토와 장소 감각이 풍경의 형식으로도 구현되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김종태를 단지 “색채가 뛰어난 인물화가”로만 묶어 둘 것이 아니라, 조선의 생활 세계와 장소성을 서양화로 번역한 작가로 보아야 한다.


화가이자 비평가였다는 사실 
심층 연구에서 특히 보강해야 할 대목은 김종태가 그림만 그린 화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최근 연구는 그의 문필 활동과 매체 비평문을 본격적으로 검토하면서, 김종태가 자신의 예술 의식을 글로도 분명히 표현한 화가였다고 강조한다. 그는 당대 미술비평의 시각 자체를 비판적으로 보았고, 조선 예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했다. 다시 말해 김종태는 화면 안에서만 실험한 작가가 아니라, 무엇이 조선적인가를 언어로도 사유한 작가였다. 이 점은 그를 단순한 “요절한 천재”보다 훨씬 입체적인 근대 예술가로 만든다.

그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것이 파리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종우의 개인전을 본 뒤 남긴 평문이다. 한국사 콘텐츠 아카이브는 김종태가 이 전시에 대해 조선인 작가라면 “조선인 고유색”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하며, 외국풍을 지향하던 세태에 일침을 놓았다고 정리한다. 또 최근 논문 소개는 그가 생각한 향토색이 병풍, 수저집 주머니, 솔, 학, 불로초, 구름, 산수처럼 어려서부터 주변에서 보아 온 생활 이미지와 밀접했다고 설명한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김종태가 ‘조선적’이라는 말을 민족주의적 구호나 표피적 장식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에게 향토색은 삶의 주변에 이미 있는 일상적 감각이었다. 그의 회화가 조선복을 입은 인물, 낮잠 자는 아이, 생활의 색을 화면에 올렸던 이유도 결국 여기에서 설명된다.


짧은 생애와 남은 공백 
1930년 이후 김종태는 서울을 떠나 한동안 도쿄에서 활동했으며, 여러 자료는 이 시기의 이과전 출품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그는 개성과 평양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평양 전시 도중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만 사인에 대해서는 자료가 일치하지 않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전시를 갖는 도중 급환으로 평양에서 별세”했다고 적고, 여러 후대 기사들은 이를 장티푸스로 설명하며, 다른 연구 소개문은 급성 장염으로 적기도 한다. 따라서 김종태의 죽음을 특정 병명 하나로 단정하기보다는, 1935년 평양 개인전 중 급병으로 쓰러져 8월 17일 세상을 떠났다는 점만을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더 신중하다.

이렇게 짧은 생애는 그의 작품 보존에도 치명적이었다. 백과사전은 친구들이 장례를 치르고 서울에서 유작전을 열어 주었다고 전하지만, 정작 많은 작품은 흩어졌고 연구자들은 지금도 몇 안 되는 유화와 기사, 평문, 전시 기록을 조합해 그의 세계를 복원하고 있다. 그래서 김종태는 한편으로는 너무 적은 작품만 남긴 작가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적음 자체 때문에 더 강한 존재감을 갖는 작가다. 후대가 그를 기억하는 방식도 여기서 갈린다. “요절한 천재”라는 호명이 그의 비극을 강조한다면, 오늘의 미술사 연구는 그 말을 넘어서 김종태를 식민지 조선에서 서양화의 언어를 조선의 시각과 생활 감각으로 다시 조직한 실험가이자 비평가로 읽으려 한다. 강서의 지역 기억도 이 지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김종태는 단순히 “마곡동 출신 화가”라는 소유의 대상으로 남기보다, 근대 한국미술이 외래의 매체를 어떻게 자기화했는지를 보여 주는 핵심 사례로 기억될 때 비로소 현재적 인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