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김도연(金度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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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16

1948년  7월 22일  대한민국 초대 내각의 첫 국무회의에 참석한 김도연 (오른쪽 첫 번째)


상산 김도연(金度演, 1893 또는 1894~1967)은 1919년 2·8 독립선언의 대표 11인 가운데 한 명으로, 일제강점기 재일 유학생 사회를 기반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이후에는 대한민국 초대 재무부 장관과 국회의원, 야당 지도자로 활동한 정치인이다. 그는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 염창리, 오늘날 서울 강서구 염창동으로 이어지는 지역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며, 비교적 유복한 가정 환경 속에서 근대 교육을 받았다. 초기에는 태극학교와 보성중학교 등에서 수학하며 민족의식을 형성했고,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慶應大學 이재학부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유학생 사회의 중심 인물로 떠오른다.

 

도쿄 유학 시절 그는 조선인 유학생 조직의 핵심으로 활동했다. 조선유학생학우회 총무를 맡아 조직을 이끌었고, 반도중학회 등 단체를 통해 유학생들을 결집시켰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1919년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도쿄 조선 YMCA에서 열린 2·8 독립선언에 대표로 참여해 선언문 낭독에 관여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약 9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 시기는 그의 정치적 방향을 결정짓는 출발점이었다.

 

출옥 이후에도 그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1920년대 초 미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이어가며 Columbia University와 American University 등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연구하고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학위 취득 과정과 세부 이력은 자료마다 차이가 있어 일부는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 이 시기 그는 북미 한인 사회와 연결되어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대한인동지회 활동, 『삼일신보』 발간 참여 등을 통해 해외 민족운동의 기반을 확장했다.

 

1930년대 초 귀국한 그는 연희전문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며 지식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조선흥업주식회사 사장을 맡아 경제 실무 경험도 쌓았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도 그의 삶은 안정되지 않았다. 조선어학회 사건과 흥업구락부 사건 등에 연루되어 다시 투옥되었으며, 이는 그가 단발적 참여자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식민 권력과 충돌한 인물임을 보여준다.

 

광복 이후 그는 곧바로 정치 전면에 등장한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고, 남조선과도입법의원과 제헌국회에서 재정경제 분야를 담당하며 국가 수립의 기초를 설계했다. 특히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재무부 장관으로 취임하여 전후 혼란 속에서 재정 체계를 정비하고 세제 개편, 세수 확보, 전매사업 운영, 통화 안정, 관세 정책 정비 등 국가 경제의 기본 틀을 구축했다. 이는 독립운동가가 곧바로 국가 경제 설계자로 이어진 대표적 사례다.

 

이후 그는 정치 무대에서 야당 지도자로 자리 잡는다. 민주국민당, 민주당, 신민당 등에서 핵심 역할을 맡으며 여러 차례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국회 부의장 등을 역임했다. 1960년 제2공화국 시기에는 국무총리 서리로 지명되었으나 인준에 실패했고, 이후에도 군사정권에 비판적인 입장을 유지하며 1965년 한일협정 반대 과정에서 의원직을 사퇴하는 등 정치적 신념을 지켰다. 그는 1967년 사망할 때까지 야당 정치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김도연의 생애는 하나의 선으로 이어진다. 김포 양동면이라는 지역 기반에서 출발해 일본 유학과 2·8 독립선언, 미국 유학과 국제 네트워크 형성, 귀국 후 지식인 활동과 재차 투옥, 그리고 해방 이후 국가 건설과 정치 투쟁으로 이어지는 흐름이다. 이 과정은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며, 그는 시대마다 다른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일관된 방향성을 유지했다.

 

오늘날 그의 기억은 다시 지역 속에서 재구성되고 있다. 서울 강서구 염창동 일대에는 2·8 독립운동을 기리는 공간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의 유묵 「사귀정직(事貴正直)」은 ‘사람의 일은 정직함이 가장 귀하다’는 신념을 전한다. 이처럼 김도연은 독립운동가, 경제학자, 국가 설계자, 야당 정치인이라는 복합적 층위를 지닌 인물로서, 강서·김포 지역이 근대 지식인과 정치 엘리트를 배출한 공간이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