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춘선(崔春善, 1921~2001)은 김포와 강서 일대를 기반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목회자이며, 평생을 실천적 신앙과 사회적 나눔에 바친 인물이다. ‘만교’(晩橋)라는 지명과 함께 기록에 등장하는 그는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 송정리 만교 지역(현 서울시 강서구 공항동 송정역 부근)에 거주하며 지역사회와 깊이 연결된 삶을 살았다. 이 ‘만교’는 오늘날 강서구 공항동 일대의 옛 지명인 ‘늦다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고려시대 수원과 송도를 잇는 길목에 놓인 다리의 공사가 늦어진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넓게 늘어진 들판 위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의미가 결합된 지명으로 해석된다.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비교적 넉넉한 환경에서 성장하여 일본 와세다 대학교에서 수학하였고, 한국어·중국어·일본어·영어 등 여러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유학 시기에는 일본 기독교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 징용을 거부하고 만주로 이동해 광복군에 참여, 임시정부 계열 조직에서 섭외부장 등 간부로 활동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김구와 함께 귀국한 뒤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목회자의 길을 선택하였다.
1940년대 후반부터 김포 지역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교회를 개척·시무했고, 김은석 목사와의 교류 속에서 성경 연구와 전도 활동을 병행하였다. 1950년대에는 그의 자택이 집회와 성경 봉독의 공간으로 사용되며 지역 신앙 공동체의 거점 역할을 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의 생애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재산과 삶의 방식에 대한 급진적인 전환이다. 그는 김포공항과 인천을 잇는 국도 일대에 수십만 평의 토지를 상속받은 지주였으나, 한국전쟁 이후 실향민과 빈민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노숙자와 고아를 돌보는 데 재산을 사용하였다. 희년 사상에 따라 토지를 개인 소유로 고정하지 않았으며, 일부 토지는 등기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타인에게 넘어간 사례도 있었다. 또한 독립유공자로서 받을 수 있었던 국가 보상과 교육 지원 역시 거부하였다. 이러한 선택은 물질적 축적을 거부하고 신앙적 실천을 우선한 삶의 태도로 이해된다.
1970년대 초반 이후 그는 기존의 교회 중심 목회 활동을 중단하고 문서선교와 노방전도에 전념하였다. 이 시기 “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신발을 신지 않겠다”는 선언과 함께 맨발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약 30년간 이를 지속하였다. 그는 모자와 몸에 전도 문구를 적어 부착하고 지하철과 거리에서 반복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활동했으며, 이로 인해 ‘맨발 할아버지’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그의 모습은 주변에서 기이하게 인식되거나 오해를 받기도 했으나, 본인은 이를 종교적 사명 수행으로 인식하고 지속하였다.
그는 지하철에서 전도 활동을 이어가던 중 2001년 9월 8일 열차 안에서 앉은 상태로 사망하였다. 사망 시점에 대해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개인 문서에 근거한 내용으로 추가적인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확실하지 않음). 사후에는 독립운동 공적이 인정되어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후, 다큐멘터리 감독 김우현이 생전의 모습을 기록한 영상을 바탕으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작품을 제작하면서 그의 삶은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영상은 이후 DVD와 도서로 확장되어 유통되었으며, 종교적 실천과 개인적 헌신의 사례로 소개되었다.
최춘선은 독립운동가, 종교인, 지역사회 실천가라는 여러 층위가 겹쳐진 인물이다. 그의 생애는 공식 기록과 더불어 종교 자료, 개인 증언, 영상 기록에 의해 전해지며 일부 서술은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시기의 저항, 해방 이후의 공동체 형성, 그리고 산업화 시기 도시 주변부에서 이루어진 개인적 구호 실천이 하나의 생애 안에서 연결된 사례라는 점에서 일정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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