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천현아(陽川懸衙)는 가양동 239번지에 있었으며, 중앙에는 동헌인 종해헌(宗海軒), 동쪽에는 객관인 파릉관(坡陵館), 남쪽에는 아전들이 거주하는 녹청(錄廳), 북쪽에는 향청(鄕廳)이 있었다. 향청의 동쪽에는 장교청이 있었고, 그 앞 좌우에는 창고가 배치되어 있었다.
종해헌 현판 글씨는 양천의 명문가 원주김씨 출신이자 명필이었던 만교(晩橋) 김경문(金敬文, 1602~1692)이 1679년(숙종 5)에 썼다. ‘종해(宗海)’는 종주(宗主)라는 뜻으로, 명나라 멸망 후 바닷길로 이어지던 조종(朝宗)의 길이 끊어진 상황에서, 조선이 중화문화를 계승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담아 붙인 이름이다.
사천 이병연(榜川 李秉淵)은 종해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 〈종해청조(宗海聽潮)〉를 지어 겸재에게 화제로 삼게 하였다. 크구나 믿을 만한 너른 바다, 감개 어려 조수(潮水) 밀리는 노래를 듣는다. 조종(朝宗)의 길 막힌 후에, 하늘과 땅에 노기(怒氣)만 가득하다.
1797년(정조 21) 가을, 정조가 원종(元宗)의 능인 장릉으로 행차하면서 종해헌에 잠시 머물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한강 가을 물결은 무명배를 펼쳐 놓은 듯, 무지개 다리를 밟고 가니 말발굽이 가볍다. 사방 들녘을 바라보니 누런 구름이 가득, 양천 일사(一舍)에서 잠시 군대를 쉬어간다.
파릉관은 1606년(선조 39) 4월 11일, 사신으로 온 중국의 한림학사 주지번(朱之蕃)이 이 객관에 머물며 ‘파릉관’이라 이름 짓고 자필 현판을 걸었다. 이로 인해 양천의 별호를 ‘파릉’이라 하게 되었으며, 파릉관은 양천현아의 동헌보다 약 60년 먼저 세워졌다. 중국 사신들이 한강 연안의 이곳을 자주 찾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양천현아 부근 궁산 기슭에는 은촉루(銀燭樓)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고려 때 정당문학을 지낸 윤자(尹慈)는 은촉루에서 다음과 같은 시 〈고객영조해람행(賈客迎潮解緩行)〉을 읊었다. 갯가에 앉은 어옹은 한낮에도 낚싯대를 드리우고, 상인들은 조수를 맞아 배를 띄워 간다. 파도 위의 백구들은 나를 비웃겠지만, 일생 동안 무엇에 헛된 이름을 얽매이랴. 은촉루에서 바라본 한강의 흐름과 낚시하는 어옹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으며, 벼슬과 명예를 버리고 사는 삶이 참된 삶으로 여겨졌다.
지도 - 양천군읍지

사진출처 - 강서구청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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