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 유래

염창동

운영자

2026-04-09


염창동은 서해 염전에서 한강으로 들어온 소금을 서울로 실어와 보관하던 창고가 있던 데서 ‘염창(鹽倉)’이라 불렸으며, 소금이 국가 전매 품목이라 관리·경계가 엄격했고 소금배가 주로 정박하자 양천현령·현감의 위세도 컸다. 소금은 물에 잘 녹아 마포까지 올리지 않고 염창동 103번지 일대에서 하역·저장했는데, 물량 손실과 암거래가 잦아 관리들이 곤욕을 치렀고, 물량이 많을 때는 상염창·중염창·하염창으로 나누어 보관했으며 이 명칭은 웃마을·아랫마을 전승과도 이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염창이 양천현아(가양동 향교 일대)에서 동쪽 8리, 대략 염창동 산 29-3번지 부근에 있었다고 하며, 서해·남해 염전에서 들어온 소금은 영흥도·영종도를 거쳐 강화·김포 사이로 들거나 강화 외해를 통해 한강으로 직입하는 두 경로로 운반되었다. 

 

염창에 내린 소금은 국가용·군사용·일반판매용으로 구분 저장되었고(전매품), 손실·암거래가 심해 출발량이 도착 시 1/50에도 못 미치는 일도 있었다고 전한다. 한강 물목이 좁고 유속이 빨라 여울이 자주 생기고 수해가 잦아 연안 접안 여건이 좋지 않았으며, 이를 피해 염창산 자락으로 취락이 옮겨 붙어 마을이 형성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관리상의 곤란으로 염창 이전 요청이 반복되었고 숙종 때 폐지되었다고 전하며, 설립 시기는 대략 1650~1730년으로 관영·민영 가능성이 모두 거론되지만 운영 주체·정확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관영일 경우 한강 이남 내륙 고을의 유통 거점, 민영일 경우 도매상 매집 거점으로 기능했을 것으로 본다. 

 

한편 이 일대는 고구려 때 ‘제차파의현’, 신라 때 한산주 소속을 거쳐 경덕왕 때 ‘공암(孔岩)’으로 고쳐 통진군에 속했다고 전하며, 현재 강변 풍경은 1982년 착공·1986년 개통된 올림픽대로(제방 겸 도로) 조성으로 과거 수운 환경과 달라졌다.

*사진 - 조선 말기 군현지도첩